들어가며: 공짜여야 할 것들의 역설
마트에 가면 이상한 진열대가 있습니다.
500원이면 수돗물을 한 양동이 받을 수 있는데, 옆자리에는 3,500원짜리 프리미엄 생수가 줄지어 서 있습니다. 그 옆에는 1,800원짜리 양상추 한 통이 통째로 있는데, 그 바로 위 칸에는 같은 양의 양상추를 미리 씻어 잘라서 봉지에 담은 "프리워시드 샐러드"가 4,900원에 팔리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TurboTax 같은 세금 신고 소프트웨어가 무려 99달러에 팔리는데, 사실 IRS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같은 일을 무료로 할 수 있습니다.
논리적으로는 공짜여야 할 것들이, 여전히 비싸게 팔리고 있습니다.
투자 블로그 Mr. Market의 글 "Products are out, brains are in"은 이 진열대 옆에 한 가지를 더 올려놓습니다. 소프트웨어입니다. AI가 한 시간이면 비슷한 SaaS를 뚝딱 만들어 주는 시대에도, 기업들은 여전히 한 달에 수십만 원씩 SaaS 구독료를 내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이제 그 돈은 무엇을 사고 있는 걸까요?
이 글은 그 질문을 추적합니다. 마크 앤드리슨이 "Software is eating the world"를 외친 2011년부터, AI가 소프트웨어를 먹기 시작한 2022년, 그리고 SaaSpocalypse라는 단어가 등장한 2026년까지의 흐름을 따라가며, 우리가 마주한 새로운 질문에 답해 봅니다.
소프트웨어의 한계비용이 0에 수렴하는 시대에, 기업이 사는 것은 무엇인가?
미리 결론을 던지면 이렇습니다. "제품(product)"이 아니라 "뇌(brain)" 입니다. 더 정확히는, 그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어떤 판단을 어떤 근거로 내리는가입니다. 이 글에서는 그 답이 왜 자연스러운 결론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21세기의 네 번째 생산요소가 되었는지를 살펴봅니다.
1장. 15년의 변화: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먹다, AI가 소프트웨어를 먹다
2011년, 마크 앤드리슨의 예언
2011년 8월, 월스트리트저널에 한 편의 에세이가 실립니다. 제목은 "Why Software Is Eating the World". 글쓴이는 넷스케이프 창업자이자 a16z의 수장, 마크 앤드리슨이었습니다.
핵심 주장은 단순했습니다. 모든 산업은 결국 소프트웨어 회사로 재편된다. 자동차 회사는 운전 소프트웨어 회사가 되고, 영화 회사는 스트리밍 소프트웨어 회사가 되고, 은행은 결제 소프트웨어 회사가 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 예언은 정확하게 들어맞았습니다. 2011–2021년의 10년은 SaaS의 황금기였습니다.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먹어치우는 10년 (2011–2021)
이 시기 SaaS 회사들의 무기는 명확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만들 수 없거나, 만들기 너무 어렵거나, 만들기 너무 귀찮은 소프트웨어를 만들었습니다." 그것 자체가 가치였습니다.

2022년, AI가 소프트웨어를 먹기 시작하다
2022년 11월 30일, OpenAI가 ChatGPT를 공개합니다. 그 이후 2년간 일어난 일은 모두가 아는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이 글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다른 숫자입니다.
GPT-3 → 2026년: AI API 가격 변화 (Output token, USD per 1M tokens, 기준 GPT-3 davinci $60)
2020 GPT-3 davinci
$60.00
2026 Haiku 4.5 / o-mini 급
$0.25 수준
5년 만에 97% 이상 가격이 하락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기간, AI가 만들어낼 수 있는 코드의 품질은 수십 배 좋아졌습니다. 이 두 곡선이 만나는 지점이 정확히 2026년이고, 그 결과로 새로운 단어가 등장합니다.
2026년, SaaSpocalypse
2026년 2월, Fortune은 "Marc Andreessen made a dire software prediction 15 years ago. Now it's happening in a way nobody imagined"이라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모건스탠리는 같은 달 보고서에서 SaaSpocalypse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핵심은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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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 예언: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먹는다
모든 산업이 소프트웨어 회사로 재편된다. 코드를 짤 줄 아는 자가 세상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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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의 반전: AI가 소프트웨어를 먹는다
Cursor, Lovable, v0 같은 도구로 코드 생성 비용이 0에 수렴. 누구나 며칠이면 비슷한 SaaS를 흉내낼 수 있게 됨.
!
새로운 질문: 그럼 우리가 사는 것은 무엇인가
"만들 수 없어서" 사던 것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사고, 결국에는 "누구를 믿어야 안전한가"로 질문이 이동.
여기서 첫 번째 중요한 통찰이 나옵니다. 한계비용이 0에 수렴해도, 가격은 0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격을 만드는 요소가 "원가"에서 "다른 것"으로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그 "다른 것"이 무엇인지가, 이 글의 본격적인 주제입니다.
2장. 진열대의 비밀: 우리는 왜 비싼 양상추를 사는가

한계비용 0의 역설
경제학 교과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완전경쟁 시장에서 한계비용이 0에 수렴하면 가격도 0에 수렴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양상추 하나를 다듬는 데 드는 비용은 거의 0이지만, 그 양상추는 여전히 비싸게 팔립니다.
왜일까요? 답은 단순합니다. 사람들이 사는 게 양상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 진열대 위 상품 | 표면적으로 사는 것 | 실제로 사는 것 |
|---|
| 프리미엄 생수 | H₂O | "수돗물 마시기 싫음"의 안도감, 미네랄 라벨이 주는 신뢰 |
| 프리워시드 샐러드 | 양상추 | 씻고 자르는 5분, 손에 묻는 물기, 식중독 걱정의 부재 |
| TurboTax | 세금 신고 양식 | "내가 양식을 잘못 채워서 IRS에 끌려갈 일은 없음"이라는 책임 회피 |
| 2026년의 SaaS | 기능 | 유지보수의 번거로움 회피, 그리고 무엇보다 — 의사결정의 책임 회피 |
Mr. Market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이렇습니다.
"만들 수 없어서 사는 게 아니라, 만들고 싶지 않거나, 띄우고 유지할 시간이 없어서 사는 것이다."
"Rather than buying it because they can't build it themselves, they may buy it because they don't want to build it or they don't have the time to spin it up or maintain it."
이 한 줄에 시장의 본질이 바뀐 양상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능력"에 대한 시장에서 "선택"에 대한 시장으로 옮겨 간 것입니다.
그런데 능력 시장과 선택 시장의 결정적 차이
선택 시장에서 구매자가 묻는 질문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능력 시장의 질문
→
"이 도구가 작동하는가?"
→
"우리가 못하는 걸 해주는가?"
선택 시장의 질문
→
"이걸 골랐다는 이유로 내가 곤란해지지 않을까?"
→
"3년 뒤에도 이 회사가 우리 옆에 있어줄까?"
→
"이 사람들의 판단력을 내가 믿을 수 있는가?"
특히 규모가 큰 규제 산업의 의사결정자가 SaaS를 살 때, 그의 머릿속에는 두 가지 두려움이 끊임없이 돌아갑니다.
- "이거 잘못 골라서 내가 회사에 큰 손해 끼치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개인적 책임)
- "잘못된 시스템을 도입해서 우리 조직 전체를 비싸게 갈아엽지 않을까?" (조직적 비용)
이 두 가지 두려움 앞에서, 기능 비교표는 점점 무력해집니다. 기능 비교표가 비슷비슷한 60개의 CRM 사이에서 의사결정자가 진짜로 비교하는 것은 — "누가 나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을 사람인가" 입니다.
이것이 양상추를 다듬는 비용보다 양상추 봉지에 붙은 "우리는 매일 새벽 5시에 산지에서 직접 받아 4단계 살균을 거쳐..." 라는 문구가 더 비싸게 팔리는 이유입니다.
3장. 21세기의 네 번째 생산요소: 판단의 질(Decision Quality)

애덤 스미스부터 피터 드러커까지
경제학 교과서는 오랜 시간 동안 생산요소를 세 가지로 가르쳤습니다.
18C
토지(Land) — 농경 시대의 핵심. 더 많은 토지가 더 많은 수확을 의미했습니다.
19C
노동(Labor) — 산업혁명의 동력. 공장과 사람의 결합이 부의 원천이었습니다.
20C 전반
자본(Capital) — 기계, 공장, 인프라. 같은 노동이라도 더 좋은 기계를 가진 쪽이 이겼습니다.
20C 후반
지식(Knowledge) — 피터 드러커가 "지식근로자(knowledge worker)"라는 개념을 제시. 정보·기술·노하우가 생산요소로 추가됩니다.
21C
판단의 질(Decision Quality) — Mr. Market이 짚어낸, 21세기의 네 번째 생산요소. 같은 도구, 같은 정보를 가져도 결과가 달라지는 진짜 이유.
피터 드러커가 1959년 Landmarks of Tomorrow에서 "지식근로자"라는 단어를 처음 쓴 이후, "지식"은 자본만큼이나 결정적인 자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2022년 이후 AI가 등장하면서, 한 가지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지식은 이제 거의 무료입니다. GPT가 1초에 박사 5명 분량의 텍스트를 쏟아내는 시대에, "지식 그 자체"는 더 이상 희소 자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희소한 자원으로 남아 있을까요?
허버트 사이먼의 1978년 노벨상
197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허버트 사이먼(Herbert Simon) 의 핵심 개념을 짚을 차례입니다. 그는 bounded rationality(제한된 합리성) 라는 개념으로 인간 의사결정을 새로 정의했습니다.
전통 경제학은 가정합니다. 합리적 인간은 모든 정보를 가지고 최적의 결정을 내린다. 사이먼은 이걸 반박합니다. 인간은 세 가지 한계 속에서 결정합니다.
사이먼의 Bounded Rationality — 의사결정의 3가지 한계
🧠 인지 한계
머릿속에 동시에 담을 수 있는 정보의 양
📊 정보 한계
애초에 우리가 알 수 있는 정보의 한계
⏱️ 시간 한계
결정을 내리기까지 주어진 시간
여기서 사이먼의 통찰은 결정적입니다. 세 한계 중 어느 하나가 풀려도, 다른 두 개가 풀리지 않으면 결정 품질은 그대로다. 그리고 AI는 정확히 세 한계 중 두 개(인지, 시간)는 풀어 줄 수 있지만, 세 번째 — "애초에 어떤 정보가 의미 있는가를 알아보는 안목" 은 풀어 줄 수 없습니다.
Mr. Market은 이 지점을 정확히 짚습니다.
"결정을 실행하는 비용은 자동화·소프트웨어·AI 덕분에 끊임없이 떨어졌다. 그런데 결정해야 할 일들 중에서 무엇이 최선인지를 가려내는 비용은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The cost of executing a decision has been falling relentlessly fast for a while because of automation, software, and now AI. But the cost of making the BEST decision about what to execute has not fallen at all."
이 한 줄이 21세기의 새로운 생산요소가 왜 "판단의 질"인지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자동화의 역설: 자동화가 진행될수록 더 비싸지는 것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이 결론은 역설을 품고 있습니다. 자동화가 진행될수록, 자동화될 수 없는 것의 값어치가 올라간다는 점입니다.
실행 비용 (코드 짜기, 데이터 처리, 보고서 작성)
2026년: ~8% (vs 2015년 기준)
판단 비용 (어떤 시장 진입, 어떤 가격, 누구를 채용)
2026년: ~96% (사실상 변하지 않음)
이 두 곡선이 점점 벌어질수록, 한 회사의 가치는 실행 능력이 아니라 판단 능력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리고 판단 능력은 그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습니다. 즉, 우리가 SaaS를 사면서 진짜로 사는 것은 — 그 회사의 사람들의 머리 입니다.
여기서부터 글의 제목이 의미를 갖기 시작합니다. Products are out, brains are in.
4장. 줄다리기 메타포: 같은 도구, 다른 결과

두 회사의 사고 실험
두 회사 A와 B가 있다고 합시다. 둘 다 똑같이:
- GPT-5, Claude Opus 4.7, Gemini 3을 무제한으로 씁니다
- Cursor, Linear, Figma, Notion, GCP, AWS를 다 씁니다
- 회사 규모도, 자본도, 인재 채용 채널도 동일합니다
이제 둘 다 같은 시장에 같은 시점에 진입합니다. 1년 뒤, 한 회사는 시리즈 B를 받고, 다른 회사는 사라집니다. 무엇이 갈랐을까요?
Mr. Market의 답은 명료합니다. 수많은 작은 판단의 누적 품질입니다.
사고
"이 고객군부터 들어갈까, 저 고객군부터 들어갈까?" — A는 가설을 세우고 두 후보의 5년 후 LTV를 계산. B는 영업이 더 잘 되는 쪽으로 선택.
행동
"이 기능을 먼저 만들까, 저 기능을 먼저 만들까?" — A는 retention 곡선의 기울기 변화를 기준으로. B는 가장 큰 고객이 요구하는 걸로.
관찰
"이 채널에 마케팅 예산을 더 넣을까?" — A는 CAC payback이 6개월 안인 채널만. B는 클릭률 좋은 채널.
↓ 매일 반복 × 365일
누적
365 × 50 = 18,250개의 작은 판단. 각 판단의 품질 차이가 평균 5%만 나도, 누적된 차이는 회사의 운명을 가른다.
이것이 Mr. Market이 말하는 "slow compounding of better thinking" 입니다. 단 하나의 천재적 결정이 아니라, 천 개의 평범하지만 더 나은 결정의 누적이 결정 품질의 진짜 모습입니다.
실제 사례: 같은 시장, 다른 판단
이 메타포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어떻게 작동했는지, 몇 가지 사례를 봅시다.
사례 1. Stripe vs Braintree (2010년대 중반)
2011년 결제 API 시장에는 Stripe, Braintree, Paypal Pro 등 여러 후보가 있었습니다. API 품질은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콜리슨 형제는 개발자 문서를 제품으로 본다는 판단을 일찍부터 했습니다. 같은 결제 API였지만 어떻게 가르치고, 어떻게 신뢰를 쌓는가에 대한 수천 개의 작은 판단이 누적되어 — Stripe만 살아남았습니다.
사례 2. Linear vs Jira (2020년대)
Jira는 이미 시장 90%를 점유하고 있었습니다. Linear가 등장했을 때, 기능 비교표상으로는 Jira가 압도적이었습니다. 그런데 Linear는 "속도와 디자인 자체가 의사결정의 일관성에서 나온다"는 판단을 했고, Method 페이지에 자신들의 의사결정 원칙을 공개했습니다. 기능을 추가할 때보다 제거할 때 더 강한 근거를 요구한다 같은 작은 규칙들이 누적되어, Linear는 6년 만에 시장의 의미 있는 부분을 가져갔습니다.
사례 3. Anthropic vs OpenAI (2022–2026)
같은 트랜스포머, 비슷한 컴퓨팅 자원, 비슷한 인재 풀. 그런데 두 회사는 일찍부터 "안전을 어떻게 제품으로 만들까" 에 대해 다른 판단을 했습니다. Anthropic은 Constitutional AI 논문, Mechanistic Interpretability 시리즈, Responsible Scaling Policy를 통해 사고 과정을 공개했습니다. 이 누적된 "우리는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의 콘텐츠가, 결과적으로 규제 산업의 큰 고객들에게 도달했습니다.
세 사례 모두에서 공통된 점이 있습니다. 이긴 쪽은 "더 좋은 제품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더 잘 생각한 것을 공개했다"고 말합니다.
5장. 워런 버핏의 60년: 판단을 자산화하는 가장 오래된 사례

매년 한 통의 편지
워런 버핏은 1965년부터 2025년까지, 무려 60년간 매년 한 통의 편지를 주주들에게 썼습니다. 글의 제목은 항상 같습니다. "To the Shareholders of Berkshire Hathaway."
이 편지는 단순한 IR 자료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매년 PDF가 공개되는 시점에 모여서 함께 읽고, 토론하고, 인용합니다. 컬럼비아, 와튼, 스탠퍼드의 비즈니스 스쿨에서 정식 커리큘럼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2025년 Inc. 매거진은 이 편지를 "비즈니스 스쿨에서 가르쳐야 할 6가지 이유"라는 기사로 다뤘습니다.
왜 사람들이 이 편지를 자산처럼 다룰까요? 답은 단순합니다. 그 편지는 60년간의 일관된 사고 과정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버핏의 글쓰기 4가지 원칙
버핏의 편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4가지 원칙이 일관됩니다.
| 원칙 | 실천 방식 | 2026년 회사들이 배울 점 |
|---|
| 1. 설명의 청자 | "여동생에게 설명한다고 상상하라" — 똑똑하지만 재무에 평생 시간 쓰지 않을 사람 | 전문용어를 들어내고, 결정의 본질을 일반어로 옮기는 훈련 |
| 2. 실수의 공개 | 매년 잘못한 결정을 따로 한 챕터로 분리해 기록 ("Mistakes") | 예측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이 신뢰의 출발점 |
| 3. 장기 일관성 | 60년간 동일한 판단 원칙 ("circle of competence", "margin of safety")을 반복 적용 | 유행에 따라 메시지를 바꾸지 않는, 일관된 사고 프레임 자체가 자산 |
| 4. 회계의 투명성 | 분식회계처럼 보일 만한 수치를 직접 풀어서 설명 | "보여주고 싶은 그림"이 아니라 "있는 그림"을 보여주는 용기 |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편지는 버크셔의 "제품"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버크셔의 가장 강력한 해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버크셔가 "무엇을 사는 회사" 이기 때문에 투자하는 게 아니라, "버핏과 멍거의 머리로 무엇을 사기로 결정하는 회사" 이기 때문에 투자합니다. 60년의 편지가 그 머리를 외부에서 검증 가능한 자산으로 만들었습니다.
2025년의 전환: 버핏이 떠난 뒤
2025년 말 버핏은 CEO직에서 물러났고, 2026년 3월 새 CEO 그렉 아벨이 첫 주주서한을 썼습니다. CNBC는 그 편지를 한 줄 한 줄 비교 분석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과연 그 60년의 사고 자산이 다음 세대에도 이어질 것인가를 시장이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brain을 자산화한다는 말의 진짜 의미입니다. 60년의 사고 과정을 공개하면, 그 사고는 조직의 자산이 되어 다음 세대에게 인수인계됩니다. 반대로 사고 과정이 공개되지 않은 회사는, 그 사람이 떠나면 함께 사라집니다.
6장. 2026년 창업자의 새로운 무기: Founder Content

무엇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Mr. Market은 창업자에게 5가지를 권합니다. 한국 맥락으로 풀어 보면 이렇습니다.
2026년 창업자가 뇌를 보여주는 5가지 방법
1. 예측 공개
시장이 어디로 갈지, 우리 로드맵이 왜 이 순서인지 — 구체적이고 반증 가능하게
2. 추론 과정
결론만이 아니라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의 과정을 글로
3. 실수 인정
틀린 예측을 따로 모아 공개. 정정과 학습을 보여준다
4. 팀 가시화
CEO만이 아니라 핵심 엔지니어·디자이너·PM의 사고도 노출
5. 잡음 제거
"조용하지만 옳게" — 떠들썩한 자기홍보보다 묵직한 한 편의 글
Mr. Market이 마지막에 던지는 한 줄이 인상적입니다.
"조용하지만 옳게. 시끄럽고 말 많고 틀린 게 아니라."
"Be quiet but right, basically. Not loud and talkative and wrong."
2026년 글로벌 실전 사례: 사고를 공개한 회사들
Stripe Press(2018년~)
Stripe는 Press 페이지를 통해 단순한 회사 블로그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책을 신뢰하는지" 까지 공개합니다. 패트릭 콜리슨의 "Things I've changed my mind about" 같은 글은, 그가 어떤 사람들의 생각을 듣고 변화했는지의 흔적입니다.
Linear Method(2020년~)
Linear의 Method 페이지는 "이런 식으로 일합니다"가 아니라 "왜 이런 식으로 일하기로 결정했는지"를 공개합니다. 16개 원칙 각각에 결정의 맥락과 반례가 붙어 있습니다.
Anthropic Research(2022년~)
Anthropic은 매주 논문을 내지만, 그 논문들이 모두 "우리가 어떤 위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 공개 기록입니다. Constitutional AI, Mechanistic Interpretability, RSP 같은 연구들은 모두 우리의 사고 과정 자체가 우리의 차별화라는 선언입니다.
a16z(2009년~)
앤드리슨 호로위츠는 펀드를 콘텐츠 회사처럼 운영합니다. 마크 앤드리슨의 "Why software is eating the world", "It's time to build" 같은 글은 회사의 정체성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제품(=투자)이 아니라 판단(=세계관)을 마케팅하는 전형입니다.
Naval Ravikant의 트위터(2018년~)
Naval은 회사가 아니지만, 자신의 사고 방식을 트윗 스레드로 자산화한 가장 극단적인 사례입니다. 그의 "How to Get Rich (without getting lucky)" 스레드는 책 한 권 분량을 글머리 기호 40개로 압축한 사고의 인덱스입니다.
2026년 한국에서: 무엇이 부족한가
한국 스타트업의 흔한 패턴은 이렇습니다. 제품에 대한 콘텐츠는 많지만, 판단에 대한 콘텐츠는 거의 없습니다.
| 유형 | 한국 스타트업의 흔한 패턴 | 2026년 시장이 요구하는 것 |
|---|
| 블로그 | "우리 신기능 출시!" | "우리는 이 기능을 만들기로 한 이유" |
| CEO 인터뷰 | "훌륭한 팀, 거대한 시장" | "우리가 작년에 틀렸던 예측 3가지" |
| 홈페이지 | 기능 비교표 | 의사결정 원칙 페이지 |
| 채용 페이지 | "빠른 성장, 좋은 동료" | "우리가 일하는 방식과 왜 그렇게 일하는지" |
| 투자 IR | TAM, SAM, SOM | 위 모든 것 + "지난 6개월 동안 우리의 판단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
여기서 핵심 포인트가 하나 있습니다. 이건 마케팅이 아닙니다. 마케팅은 우리가 좋다를 외치는 것이고, founder content는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전자는 광고비를 더 쓰면 키울 수 있지만, 후자는 실제로 생각하지 않으면 만들 수 없습니다. 그 차이가 바로 새로운 해자입니다.
7장. 코어닷투데이의 시선: 우리가 뇌를 보여준다는 것
이 글을 쓰면서 우리(코어닷투데이)도 같은 거울 앞에 섭니다. 우리가 만드는 제조업 AI, 의회 AI, Fact Explorer 같은 제품들도, 2026년의 시장에서는 "기능이 무엇이냐" 보다 "우리가 어떤 판단으로 만든 것이냐" 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매일 던지는 질문들
// 제조업 AI
Q. 같은 데이터를 가지고 정확도 89%와 91%의 모델이 있다.
우리는 91% 모델 대신 89% 모델을 선택했다. 왜?
→
제조 라인 정지 비용이 오탐 1건당 8천만원. 정확도보다 false positive rate가 낮은 쪽을 선택.
// 의회 AI
Q. 의안 요약 모델이 LLM 단독으로 만들 수도 있다.
우리는 일부러 인용/근거 추적 단계를 분리했다. 왜?
→ 국회의원 보좌관이 사용한다. 한 줄이 잘못되면 본회의장에서 곤란해진다. 환각률보다 검증 가능성을 우선.
// Fact Explorer
Q. 출처 표기를 자동 생성할 수도 있다.
우리는 사용자에게 "근거 부족"이라고 말하는 케이스를 더 자주 띄우기로 결정. 왜?
→ 잘못된 자신감보다 정직한 무지가 더 비싼 의사결정을 보호한다.
이 결정들은 기능 비교표에 안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누적되면, 우리가 어떤 종류의 회사인지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누적이 우리가 외부에 신뢰를 청구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기능"이 아니라 "왜"를 적는 일
이 글 자체가 그 실천의 하나입니다. 다른 SaaS 회사처럼 "우리 신기능을 보세요" 라고 쓰는 대신, "왜 지금 시장이 이렇게 바뀌고 있는지, 우리는 어떻게 보는지" 를 적는 것. 우리는 이 글이 어떤 영업 자료보다 더 강하게, 어떤 종류의 고객을 우리에게 보내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2026년의 코어닷투데이가 외부에 가장 자주 공유하는 것은 — 제품의 스크린샷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결정했는지에 대한 글 입니다.
8장. 마무리: AI가 발전할수록 인간의 판단은 더 비싸진다
역설적 결론
이 글을 시작한 질문은 단순했습니다. "AI가 코드를 짜주는 시대에, 왜 SaaS는 여전히 비싼가?"
답은 더 단순합니다. 사람들이 사는 게 코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2011년
→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먹는다 (Software eats the world)
2022년
→
AI가 소프트웨어를 먹는다 (AI eats software)
2026년
→
판단이 AI를 먹는다 (Judgment eats AI)
자동화가 진행될수록, 자동화될 수 없는 것의 가격은 올라갑니다. 한계비용이 0에 수렴하는 시대일수록, 한계비용이 0이 될 수 없는 것 — 인간의 판단, 그리고 그 판단의 일관성과 투명성 — 의 값어치는 거꾸로 폭등합니다. 그것이 21세기의 새로운 해자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면 되는가
세 문장으로 압축합니다.
1
기능보다 판단을 적어라.
제품 페이지보다, 의사결정 원칙 페이지가 더 강력하다. "우리가 어떤 판단을 어떤 근거로 내렸는지"가 가장 가치 있는 콘텐츠다.
2
예측을 공개하고, 틀린 것은 더 크게 공개하라.
예측 트랙 레코드를 외부에서 검증 가능하게 만들면, 그것 자체가 자산이 된다. 버핏의 60년 편지가 그 증거다.
3
팀의 뇌를 가시화하라.
CEO만이 아니라 핵심 엔지니어·디자이너·연구원의 사고를 노출하라. 줄다리기에서 줄을 함께 당기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시장이 보고 싶어 한다.
15년 전 마크 앤드리슨은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먹는다" 라고 외쳤고 그 말은 맞았습니다. 15년 후 우리는 그다음 한 줄을 적습니다.
"제품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 우리는 뇌를 산다."
그리고 그 뇌는 — 당신의 회사의 머릿속에 있는 무엇인가입니다. 그것을 외부에 보여줄 수 있는 회사만이, 한계비용 0의 시대에도 살아남습니다.
참고 자료
- Mr. Market, "Products are out, brains are in" — 이 글의 출발점
- Marc Andreessen, "Why Software Is Eating the World", a16z, 2011
- Fortune, "Marc Andreessen made a dire software prediction 15 years ago. Now it's happening in a way nobody imagined", 2026
- Herbert A. Simon, Nobel Prize Lecture, 1978 — bounded rationality
-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Bounded Rationality
- Peter Drucker, Landmarks of Tomorrow, 1959 — knowledge worker
- Inc., "6 Things Warren Buffett's Latest Shareholder Letter Can Teach You About Communicating a Message", 2025
- CNBC, "All the highlights from Berkshire CEO Abel's first shareholder letter", 2026-03-01
- Anthropic, Constitutional AI: Harmlessness from AI Feedback
- Linear, Method — 의사결정 원칙 페이지의 대표 사례
- CB Insights, "28 Lessons From Warren Buffett's Annual Letters To Shareholders"
- 코어닷투데이, "AI 시대에 진짜 안전한 것은 직업이 아니라 '판단 체계'다" — 같은 주제의 노동시장 측면
- 코어닷투데이, "지금 AI에서 가장 중요한 5가지 아이디어" — 자율 최적화·의도 기반 엔지니어링 측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