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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에 사과를 그릴 수 없는 사람들 — 아판타시아가 다시 쓰는 '상상'의 뇌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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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에 사과를 그릴 수 없는 사람들 — 아판타시아가 다시 쓰는 '상상'의 뇌과학

눈을 감고 사과를 떠올려 보라. 어떤 사람에게는 반짝이는 빨간 사과가 보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2026년 9월, 스스로 마음의 그림을 떠올리지 못하는 두 과학자가 쓴 리뷰가 '상상은 보는 과정을 거꾸로 돌린 것'이라는 지난 10년의 표준 모델에 정면으로 도전해 화제가 됐다. 이 특집은 아판타시아라는 개념이 1880년 골턴의 아침 식탁 설문에서 2015년의 명명까지 어떻게 나왔는지 따라가고, 논문의 뇌 네트워크 그림을 영역별로 해부하고, 피질맹 환자·픽사 창업자·파이어폭스 개발자의 사례로 왜 이 개념이 중요한지 보이고, 뇌 디코딩과 LLM의 '인공 판타시아'가 등장한 2026년에 이 연구가 무엇을 말해 주는지 따진다. 인터랙티브 위젯 5종과 웹툰·삽화를 함께 싣는다.

코어닷투데이2026-09-16110

들어가며 — 사과 하나를 떠올려 보세요

아판타시아 특집크게 보기

지금 잠깐 눈을 감고 사과 하나를 떠올려 보자. 빨간색인가, 초록색인가. 꼭지에 잎이 붙어 있나. 표면에 빛이 반사되는 자리가 보이나.

2020년 2월, 트위터의 한 사용자가 이 질문에 선명도가 다른 사과 그림 다섯 장을 붙여 "당신은 몇 번인가요?"라고 물었다. 게시물은 5만 5천 번 넘게 '좋아요'를 받았고, 2023년에 다시 한번 퍼졌다.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답이 극단적으로 갈렸다는 사실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사진처럼 생생한 사과가 당연했고,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없는 빈칸이 당연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평생 남들도 나와 똑같을 것이라고 믿어 왔다.

눈을 감고 사과를 떠올려 보세요크게 보기

머릿속에 그림을 떠올리지 못하는 상태를 아판타시아(aphantasia) 라고 부른다. 이름이 붙은 지 11년밖에 안 됐다. 그런데 2026년 9월 14일, 이 주제를 다룬 한 리뷰 논문이 해외 과학 매체에 소개되며 크게 화제가 됐다.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선천성 아판타시아: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 안다고 생각했지만 틀렸던 것, 그리고 모르는 것」. 저자 네 명 중 두 명은 스스로 아판타시아인이다.

이 논문이 화제가 된 이유는 아판타시아 자체보다 더 큰 질문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상상이란 뇌에서 정확히 무엇인가. 지난 10년 동안 신경과학의 표준 답은 "상상은 보는 과정을 거꾸로 돌린 것"이었다. 논문은 이 답이 "적어도 원래 형태로는 대체로 신뢰를 잃었다"고 선언하고, 대신 마음의 그림은 뇌의 여러 영역이 화음처럼 함께 울릴 때 떠오르는 창발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먼저 직접 해 보자. 아래 체험은 1분이면 끝난다.

🧭
이 글의 지도
1장 — 화제의 리뷰: 누가, 무엇을 주장했나
2장 — 핵심 개념과 용어 사전: 아판타시아는 '빈 머리'가 아니다
3장 — 역사: 아리스토텔레스의 판타시아에서 2015년의 명명까지 (연대기 위젯)
4장 — 사람들: 사례로 보는 '그림 없는 삶'
5장 — 아키텍처 ① 옛 모델: "상상은 거꾸로 보는 것"
6장 — 아키텍처 ② 균열: 시각피질이 없어도 상상하는 환자들 (예측 대결 위젯)
7장 — 아키텍처 ③ 논문 그림 해부: 온 뇌가 만드는 그림 (화음 시뮬레이터)
8장 — 측정의 문제: 왜 아직 객관적 검사가 없나 (측정 실험실 위젯)
9장 — 리뷰의 세 칸: 안다 · 틀렸다 · 모른다
10장 — 2026년, 기술의 역할: 뇌 디코딩과 '인공 판타시아'
11장 — 이 연구가 우리 일상에 주는 것

1. 화제의 리뷰 — 누가, 무엇을 주장했나

논문은 신경과학·심리학 분야 학술지 『의식과 인지(Consciousness and Cognition)』 2026년 11월호에 실렸고 9월 초 온라인으로 먼저 공개됐다. 저자는 호주 퀸즐랜드 대학교의 데릭 아널드(Derek H. Arnold), 로렌 부이어(Loren N. Bouyer), 블레이크 소렐스(Blake W. Saurels), 그리고 새뮤얼 슈바르츠코프(D. Samuel Schwarzkopf)다. 네 사람은 지난 몇 년간 "떠올리지 말라고 하면 떠오르는 분홍 코끼리"(2025), "심상 선명도는 넓은 범위의 내적 시각 경험을 반영한다"(2026) 같은 연구를 함께 내 온 팀이다.

이 팀이 특별한 이유는 아널드와 부이어 자신이 선천성 아판타시아인이라는 점이다. 둘 다 깨어 있는 동안 의지로 시각적 장면을 떠올려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부이어는 한발 더 나아가 소리도 떠오르지 않아 머릿속 혼잣말(내적 독백)이 없다. 연구 대상이 연구자 자신인 셈이다.

논문 초록을 우리말로 옮기면 이렇다.

"선천성 아판타시아는 처음에는 평생 시각화하지 못하는 상태로 기술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여러 감각(시각, 청각, 움직임, 맛, 촉각, 냄새)에 걸친 상상의 불능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이해된다. (…) 연구자들 사이에는 합의점이 있는데, 이 현상은 분산된 뇌 영역들이 협응하지 못할 때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견도 있다. 1차 시각피질이 심상에 필수적인 인과적 기여를 하는지, 선천성 아판타시아가 사물의 심상에만 해당하는지, 시각화가 의식 아래에서(역치 하로) 일어날 수 있는지. 우리는 무엇이 심상의 객관적 측정인가 같은 개념적 혼란이 이런 논쟁에 기여했다고 본다. 우리는 상상된 감각을 넓은 뇌 영역 네트워크의 협응 활동에서 창발하는 의식적 현상 경험으로 이해하는 틀을 제안한다. 그렇다면 상상된 경험은 역치 하일 수 없고, 일반 인구에서 자연스럽게 변이를 보일 것이다."

요약하면 주장은 세 개다.

1
1차 시각피질은 '화면'이 아니다
상상을 "보는 과정을 거꾸로 돌려 뇌 뒤쪽 시각피질에 그림을 다시 그리는 것"으로 본 모델은 원래 형태로는 신뢰를 잃었다. 시각피질은 그림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 조절하는 곳에 가깝다.
2
심상은 네트워크의 '창발 속성'이다
전전두엽, 두정엽, 방추상회 등 넓게 퍼진 영역이 함께 협응할 때 마음의 그림이 떠오른다. 어느 한 곳이 소유한 기능이 아니다. 그래서 고장 날 수 있는 지점도 여러 곳이고, 아판타시아의 모습도 여러 가지다.
3
'무의식적 심상'이란 말은 동어반복이다
심상은 정의상 느껴지는 경험이다. 뇌 어딘가에서 정보 조각이 읽힌다고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그림'이라 부르면 개념이 뒤섞인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온 어떤 검사도 아판타시아를 객관적으로 판정하지 못한다.

저자들은 스스로의 주장에도 선을 긋는다. "이 리뷰를 몇 년 뒤에 업데이트한다면, 우리가 안다고 생각한 것 중 일부는 틀린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제목의 괄호 속 '(생각)'이 그 겸손이다.

이 주장들이 왜 중요한지 이해하려면, 먼저 아판타시아가 무엇이고 무엇이 아닌지부터 정확히 잡아야 한다.

2. 핵심 개념 — 아판타시아는 '빈 머리'가 아니다

용어부터 정리하자

이 분야 글을 읽다 보면 낯선 용어가 쏟아진다. 이 특집에서 계속 쓰일 말들을 먼저 한자리에 모았다.

용어쉬운 뜻이 글에서 왜 중요한가
심상 (mental imagery)눈앞에 없는 것을 머릿속에서 감각처럼 경험하는 것. 그림뿐 아니라 소리·냄새·감촉·움직임도 포함한다.아판타시아는 이 '경험'이 없거나 매우 약한 상태다.
아판타시아그리스어 phantasia(감각에서 온 표상) 앞에 '없음'을 뜻하는 a-를 붙인 말. 2015년 제만 연구팀이 제안했다.선천성(태어날 때부터)과 후천성(뇌 손상·질환 뒤)으로 나뉜다. 이 리뷰는 선천성을 다룬다.
하이포판타시아 · 하이퍼판타시아하이포는 심상이 희미한 상태, 하이퍼는 실제로 보는 것만큼 선명한 상태.심상은 '있다/없다'가 아니라 연속적인 스펙트럼이다.
VVIQ1973년 데이비드 마크스가 만든 '시각 심상 선명도 설문'. 16개 장면을 1~5점으로 매긴다(총점 16~80).아판타시아 판정의 사실상 표준. 그런데 2026년 들어 그 타당성이 거세게 비판받고 있다(8장).
1차 시각피질 (V1)눈에서 온 신호가 뇌에서 가장 먼저 도착하는 곳. 뒤통수 맨 뒤에 있다.옛 모델에서는 상상의 '화면'이었다. 새 모델에서는 조절자일 뿐이다.
방추상회 (fusiform gyrus)측두엽 아래쪽 면을 따라 길게 뻗은 띠 모양 영역. 얼굴과 글자를 알아보는 데 관여한다.왼쪽 방추상회의 한 지점('방추상회 심상 노드', FIN)이 상상의 핵심 부품으로 떠올랐다.
전전두엽 (prefrontal cortex)이마 바로 뒤. 계획하고 의도하고 주의를 조절한다."사과를 떠올리자"는 요청이 시작되는 곳.
하두정엽 (inferior parietal cortex)정수리 뒤쪽 아래. 주의, 공간, 움직임 계획에 관여한다.새 모델의 네트워크 구성원.
섬엽 (insula)뇌 옆면 깊숙이 접혀 들어간 영역. 심장 박동 같은 몸 안쪽 신호를 감지한다.심상에 필요하다는 가설이 있지만 아직 논쟁 중이라 논문 그림에 물음표가 붙어 있다.
창발 (emergence)부분에는 없는 성질이 부분들이 함께 작동할 때 나타나는 것. 음 하나에는 없는 '화음'처럼.이 리뷰의 핵심 틀.
현상적 경험 (phenomenal experience)'무엇인가를 느끼는 것 같은' 주관적 경험 그 자체.저자들은 심상을 정보 처리가 아니라 이 경험으로 정의한다. 그래서 '무의식적 심상'은 모순이 된다.

흔한 오해 세 가지

오해 1: "아판타시아인은 머리가 텅 비어 있다." 아니다. 저자 아널드와 부이어에게 "텔레비전 옆에 뭐가 있나요?"라고 물으면 망설임 없이 답한다. 다만 그 답이 그림으로 오지 않는다. 그들의 표현으로는 "공간적 사실들의 집합에 대한 앎"으로 경험된다. 1880년 골턴의 설문에 한 응답자가 남긴 말도 똑같다. "관념은 마음의 그림으로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사실들의 기호로 느껴진다."

오해 2: "상상력이 없다." 역시 아니다. 아판타시아 연구의 창시자 애덤 제만은 "심상이 없다는 것이 상상력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라고 거듭 강조한다. 픽사 공동 창업자 에드 캣멀, 인어공주 아리엘을 그린 애니메이터 글렌 킨(캣멀의 전언), 인간 게놈을 해독한 크레이그 벤터가 모두 아판타시아다(4장).

오해 3: "치료해야 할 장애다." 대부분의 아판타시아인은 일상에 큰 문제 없이 산다. 2023년 독일 연구팀(몬첼 외)은 아판타시아인 156명과 대조군 131명을 비교해, 34.7%가 어떤 형태로든 괴로움을 보고했지만 일상 기능에 미치는 영향은 "정신장애로 분류하기에는 너무 약하다"고 결론 내렸다. 연구자들은 아판타시아를 질병이 아니라 사람마다 다른 내면 경험의 한 끝으로 본다.

얼마나 흔한가

측정 기준에 따라 숫자가 꽤 달라진다. 기준을 엄격하게 잡으면(VVIQ 최저점인 16점) 1% 안팎, 느슨하게 잡으면(16~23점 또는 32점 이하) 3~5%다.

0.9%
VVIQ 16점(완전한 부재)
9,063명 조사, 2024
3.9%
아판타시아 추정 비율
1,004명 조사, 2022
6.1%
하이퍼판타시아(75~80점)
9,063명 조사, 2024
약 10배
형제가 극단적 아판타시아를 함께 가질 상대 위험
제만 외, 2020

85개 국적 9,063명을 조사한 2024년 라이트 연구팀의 분포는 이렇다. 막대는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이다.

아판타시아 (VVIQ 16점)
0.9%
하이포판타시아 (17~32점)
3.3%
보통 (33~74점)
89.7%
하이퍼판타시아 (75~80점)
6.1%

1%만 잡아도 한국 인구로 50만 명이다. 한 반 30명 교실이라면 서너 반에 한 명꼴로 "사과를 떠올려 보세요"라는 말이 뜻 없는 소리로 들리는 학생이 있다.

그리고 시각만의 문제가 아니다. 2020년 도스(Alexei Dawes) 연구팀이 아판타시아인 267명을 조사했더니 26.22%가 어떤 감각으로도 심상이 없다고 답했다. 소리도, 냄새도, 맛도, 감촉도, 움직임도 떠오르지 않는다.

도스 외(2020)의 감각별 심상 레이더 차트크게 보기

▲ Dawes et al. (2020), Scientific Reports, Figure 2. 빨강 = 아판타시아 267명, 파랑 = 대조군 203명. (a) 감각별 심상 세기(시각·청각·촉각·운동감각·맛·냄새·감정): 빨간 고리가 모든 축에서 파란 고리보다 한참 안쪽에 있다. 시각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한눈에 보인다. (b) 트라우마 증상 하위 척도: 두 고리가 거의 겹친다. 아판타시아가 트라우마로부터 보호해 주지도, 더 취약하게 만들지도 않았다. (c) 밤에 꾸는 꿈의 특성: 감각적인 쪽에서 빨간 고리가 작다. (CC BY 4.0) 2026년 영국의 18~30세 약 2,000명을 조사한 연구에서는 13.9%가 여덟 가지 감각 중 적어도 하나에서 아판타시아 수준이었다.

3. 역사 — 2,300년 동안 이름 없이 존재했던 차이

아리스토텔레스: "영혼은 이미지 없이 생각하지 않는다"

아판타시아라는 이름의 뿌리는 기원전 4세기로 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에 관하여』 3권에서 이렇게 썼다. "생각하는 영혼에게 이미지는 지각 내용처럼 쓰인다. (…) 그래서 영혼은 결코 이미지 없이 생각하지 않는다." 감각에서 끌어와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그는 판타시아(phantasia) 라 불렀다.

이 문장은 2,300년 동안 거의 상식이었다. 생각하려면 그림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림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나. 이 질문이 제대로 제기되기까지는 아주 오래 걸렸다.

1880년, 골턴의 아침 식탁

1880년 골턴의 아침 식탁 설문크게 보기

다윈의 사촌이자 통계학의 개척자 프랜시스 골턴(Francis Galton)은 1880년 학술지 『마인드』에 「심상의 통계」라는 논문을 냈다. 그가 보낸 질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떠올려 보십시오. 예컨대 오늘 아침 앉았던 아침 식탁 말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눈앞에 떠오르는 그림을 주의 깊게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세 가지를 물었다. 밝기(흐릿한가, 실제 장면만큼 밝은가), 선명도(모든 물건이 동시에 또렷한가), (도자기, 토스트, 빵 껍질, 겨자, 고기, 파슬리의 색이 자연스러운가). 성인 남성 100명(그중 19명이 왕립학회 회원)과 차터하우스 학교 소년 172명이 답했다.

골턴이 놀란 것은 과학자들의 반응이었다. "내가 처음 질문을 보낸 과학자들 대다수는 심상이라는 것을 모른다고 항변했고, 나를 공상적이라고 여겼다." 그는 이들이 심상에 대해 "자기 결함을 모르는 색맹이 색에 대해 아는 것만큼이나" 모른다고 썼다. 가장 낮은 쪽 응답은 이랬다.

  • 95번: "시각화하는 능력이 없음."
  • 96번: "어떤 장면에 대한 기억을 '마음의 그림'이라고 부르는 것은 비유일 뿐이다."
  • 98번: "관념은 마음의 그림으로 느껴지지 않고, 사실들의 기호로 느껴진다."

골턴은 "과학자들은 하나의 집단으로서 시각적 표상 능력이 약하다"고 결론 내리면서도, 그 결손이 "다른 방식의 개념화로 아주 쓸모 있게 대체된다"고 덧붙였다. 다만 2006년 브루어와 쇼머에이킨스가 현대 과학자들로 같은 조사를 반복했을 때 심상이 전혀 없는 과학자는 찾지 못했고, 골턴의 데이터가 그 결론을 충분히 뒷받침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골턴이 남긴 진짜 유산은 결론이 아니라 질문이다. 같은 말을 들어도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사람마다 극적으로 다를 수 있다.

20세기: 그림이냐, 명제냐

심리학이 실험 과학이 된 뒤 심상은 격렬한 논쟁의 주제였다. 흔히 '심상 논쟁(imagery debate)'이라 부른다.

한쪽에는 그림파가 있었다. 1971년 로저 셰퍼드와 재클린 메츨러는 입체 도형 두 개가 같은지 판단하는 시간이 회전 각도에 정확히 비례해 늘어난다는 것을 보였다(초당 약 60°). 1978년 스티븐 코슬린은 외운 섬 지도에서 두 지점 사이를 머릿속으로 훑는 시간이 실제 거리에 비례한다는 것을 보였다. 마치 머릿속에 진짜 지도가 펼쳐져 있는 것처럼.

다른 쪽에는 명제파가 있었다. 1973년 제논 피질로는 "마음의 그림이라는 비유는 심각하게 오해를 부른다"며, 지식은 결국 말 같은 추상적 기술(명제)로 저장되고 그림처럼 보이는 효과는 사람들이 "실제라면 이럴 것"이라는 지식을 흉내 내기 때문일 수 있다고 반박했다.

이 논쟁은 2015년 조엘 피어슨과 코슬린이 PNAS에 「심상 논쟁의 종결」을 쓰며 그림파의 승리로 일단락됐다. 그런데 바로 그해, 아판타시아라는 이름이 붙으면서 새로운 질문이 열렸다. 그림 없이도 회전 과제를 잘 푸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무엇으로 푸는가. 명제파의 방식은 적어도 일부 사람들에게는 실제 방식이었을지 모른다.

같은 시기, 1973년 데이비드 마크스가 만든 VVIQ는 조용히 표준이 되어 갔다. 16개 장면(친구의 얼굴, 해 뜨는 풍경, 자주 가는 가게, 시골 풍경)을 1~5점으로 매기는 설문이다. 한 가지 함정이 있다. 원래 VVIQ는 1점이 "정상 시각만큼 완벽하게 선명함", 5점이 "이미지가 전혀 없음"이었는데, 제만 연구팀은 직관적으로 읽히도록 점수를 뒤집었다. 오래된 논문과 최근 논문의 숫자를 비교할 때 방향을 꼭 확인해야 한다.

2010년, 환자 MX

환자 MX의 이야기크게 보기

현대 아판타시아 연구는 한 환자에서 시작했다. 2010년 영국 엑서터 대학교의 신경과 의사 애덤 제만(Adam Zeman) 연구팀은 『뉴로사이콜로지아』에 MX라는 65세의 은퇴한 측량 기사를 보고했다. 그는 관상동맥 시술(막힌 심장 혈관을 넓히는 시술)을 받고 나흘쯤 뒤 마음의 눈이 꺼졌다. 가족의 얼굴도, 자주 가던 장소도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꿈에서도 한동안 시각적 내용이 사라졌다가 나중에 돌아왔다.

VVIQ 점수는 최저점인 16점이었다(대조군 평균 59점). 그런데 이상한 점은 표준 심상·기억 검사를 정상으로 통과했다는 것이다. 보통은 머릿속 그림을 떠올려 푸는 문제들을 다 맞혔다. 심적 회전 과제에서는 대조군보다 느렸지만(8.5초 대 6.2초) 정확도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말이 이 상태를 정확히 요약한다. "시각적 세부는 기억할 수 있는데, 그걸 볼 수가 없어요." fMRI에서는 흥미로운 차이가 보였다. 얼굴을 볼 때는 정상이었지만, 상상을 시도할 때 뇌 뒤쪽(시각 영역) 활동이 대조군보다 줄고 앞쪽(하전두회, 전대상피질) 활동이 늘었다. 연구진은 그가 다른 전략으로 문제를 풀고 있다고 해석하고, 이 상태를 '눈먼 상상(blind imagination)' 이라 불렀다.

같은 해 과학 저널리스트 칼 짐머가 『디스커버』 매거진에 이 사례를 소개했다. 그러자 20여 명이 제만에게 연락해 왔다. 내용은 비슷했다. "저는 MX와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뭘 잃은 적이 없어요. 태어날 때부터 그랬습니다."

2015년, 이름이 붙다

제만, 미카엘라 듀어, 세르조 델라 살라는 연락해 온 사람 중 21명을 조사해 2015년 6월 『코텍스』에 두 쪽짜리 짧은 논문 「심상 없는 삶 — 선천성 아판타시아」를 실었다.

21명
참가자 (19명 남성)
12명
VVIQ상 심상 완전 부재 (나머지 9명은 상당한 결손)
17명
그런데 꿈은 그림으로 꾼다
14명
언어·수학·논리에서 보상적 강점 보고

그리고 이렇게 썼다. "우리는 수의적 심상이 감소하거나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로 '아판타시아'를 제안한다." 옥스퍼드의 고전학자 데이비드 미첼이 어원을 조언했다. 실어증(aphasia)이나 부정맥(arrhythmia)처럼 '없음'을 뜻하는 접두사 a-를 아리스토텔레스의 phantasia 앞에 붙였다.

두 쪽짜리 논문이 뉴욕타임스(2015년 6월)와 BBC(2015년 8월)에 소개되자 반응이 폭발했다. 2020년까지 제만 연구팀에 연락해 온 사람이 1만 4천 명을 넘었다. 그중 한 명인 캐나다의 톰 에베이어는 2019년 '아판타시아 네트워크'를 세웠고, 2026년 현재 회원이 9만 명이 넘는다.

왜 이렇게 폭발적이었을까. 이름이 없는 경험은 스스로도 알아차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이 "마음의 눈으로 보라"는 말을 평생 비유로 알고 살아왔다. 이름이 생기자 비로소 자기 경험을 남과 비교할 수 있게 됐다.

2016년, "양을 세라는 말이 비유인 줄 알았다"

다들 진짜로 양이 보인다고?크게 보기

2016년 4월, 파이어폭스 브라우저 공동 개발자 블레이크 로스(Blake Ross)가 페이스북에 긴 글을 올렸다. 제목은 「아판타시아: 마음이 눈먼 것은 어떤 느낌인가」.

"나는 평생 아무것도 시각화해 본 적이 없다. 아버지의 얼굴도, 튀어 오르는 파란 공도 '볼' 수 없다. (…) 나는 '양을 세라'는 말이 비유인 줄 알았다. 나는 서른 살이다."

그는 뉴욕타임스에서 심상을 잃은 남자(MX)의 기사를 읽다가, 그 남자가 잃은 것을 자신은 애초에 가진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글은 수십만 명에게 공유되며 논문보다 훨씬 멀리 퍼졌다.

4. 사람들 — 사례로 보는 '그림 없는 삶'

개념이 추상적일수록 사례가 필요하다. 아판타시아가 삶의 어디에 스며드는지, 연구로 확인된 사례들을 모았다.

창작의 한가운데: 픽사의 에드 캣멀

토이 스토리를 만든 픽사의 공동 창업자 에드 캣멀(Ed Catmull)은 2019년 74세의 나이로 BBC에 자신이 아판타시아라고 밝혔다. 계기는 티베트 명상 수업이었다. 강사가 눈앞에 구체(球) 하나를 떠올리라고 했다.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일주일 내내 그 구체를 떠올리려 애썼다."

그는 호기심에 픽사와 디즈니 애니메이션 직원 540명에게 심상 선명도 검사를 돌렸다.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아티스트가 기술직보다 선명도가 약간 높았을 뿐 "큰 차이가 아니었고", 오히려 제작 관리자들이 둘보다 높았다. 그리고 동료 애니메이터 글렌 킨(인어공주의 아리엘, 미녀와 야수의 야수를 그린 사람)이 "자기도 한 번도 시각화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캣멀의 결론은 이 특집 전체를 관통한다. "사람들은 시각화를 창의성이나 상상력과 혼동해 왔다. 그 둘은 같은 것이 아니다."

과학자들: 크레이그 벤터와 올리버 색스

인간 게놈 해독을 이끈 크레이그 벤터는 2020년 엑서터 대학교 발표에서 "아판타시아는 복잡한 정보를 새 아이디어로 소화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제만 연구팀의 2020년 대규모 조사에서도 아판타시아인은 과학·수학 직종에, 하이퍼판타시아인은 창작 직종에 조금 더 많았다.

신경과 의사이자 작가 올리버 색스는 아판타시아라는 말이 생기기 전인 2003년 『뉴요커』 에세이 「마음의 눈」에 이렇게 썼다. "마음의 눈으로는 거의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기껏해야 희미하고 금세 사라지는 이미지였다." 1960년대 약물 실험 중 잠깐 선명한 심상을 경험했지만 그 뒤로는 "수십 년 동안 다시는 시각화하지 못했다"고.

테트리스를 잘하는 아판타시아인: 저자 데릭 아널드

그림 없이 테트리스를 하는 소년크게 보기

이번 리뷰의 제1저자 데릭 아널드는 어린 시절 테트리스를 잘했다. 그런데 떨어지는 블록의 그림이 머릿속에 떠오른 적은 없다. 대신 어떤 모양이 어떤 틈에 맞는지를 학습된 지식으로 알았다.

사소한 일화 같지만 이것이 논문에서 중요한 논거가 된다. 일부 설문은 "테트리스를 잘한다"를 공간 심상이 있다는 증거로 쓰는데, 아널드의 경험은 과제를 잘 푸는 것과 그림을 경험하는 것은 다른 문제임을 보여 준다. 8장에서 볼 '측정의 문제'가 여기서 시작한다.

기억: 과거가 '다시 체험'되지 않는다

아판타시아가 가장 크게 스며드는 곳은 기억이다. 많은 사람이 추억을 떠올릴 때 그 장면을 '다시 보는' 경험을 한다. 아판타시아인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만 그 장면으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말한다.

  • 2015년 첫 21명 중 14명이 자전적 기억(내 삶의 사건 기억)이 어렵다고 보고했다.
  • 2022년 도스 연구팀은 아판타시아인이 과거를 회상하거나 미래를 상상할 때 구체적 세부 묘사가 적고, 특히 새로운 미래 사건을 상상할 때 차이가 가장 크다는 것을 보였다.
  • 극단적인 경우는 2015년 캐나다 연구팀(팔롬보 외)이 보고한 SDAM(심각한 자전적 기억 결손)과 겹친다. 건강한 성인이 자기 인생의 사건을 전혀 '다시 살아' 보지 못한다.
  • 철학자 안드레아 블롬크비스트(2023)는 아예 아판타시아를 시각의 문제가 아니라 일화 기억 인출의 문제로 보는 이론을 냈다(7장).

로스가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없다"고 쓴 것도 이 맥락이다. 제만의 2020년 조사에서 아판타시아인의 48.7%가 심상 부족이 인간관계에 영향을 준다고 답했다. 세상을 떠난 가족의 얼굴을 떠올리지 못하는 슬픔은 아판타시아 커뮤니티에서 자주 나오는 이야기다(다만 이에 대한 동료 심사 연구는 아직 찾기 어렵다).

꿈: 깨어 있을 땐 못 보는데 꿈에서는 본다

꿈에서는 보이는데 깨어나면 사라진다크게 보기

아판타시아에서 가장 신기한 사실 중 하나는 많은 아판타시아인이 꿈을 그림으로 꾼다는 것이다. 2015년 첫 21명 중 17명이 그랬고, 2020년 제만 연구팀의 2,000명 조사에서는 63.4%가 시각적인 꿈을 꾼다고 답했다(하이퍼판타시아 98.5%, 대조군 89%).

2026년 6월 이번 리뷰의 저자 아널드·부이어와 독일의 메를린 몬첼은 『사이언티픽 리포트』에 아판타시아인 84명과 비교군 121명의 꿈을 조사한 결과를 냈다. 아판타시아인의 약 46%가 "항상" 그림으로 꿈을 꾸고, 약 8%는 한 번도 그렇지 않았다. 깨어 있을 때의 심상과 꿈의 감각 내용은 사람마다 제각각으로 약하게만 연결됐다. 저자들은 아판타시아를 "서로 관련된 상태들의 가족"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그림을 만드는 '부품'이 망가졌다면 꿈에서도 그림이 없어야 한다. 꿈에서는 보이는데 깨어서 의지로는 못 본다면, 문제는 부품이 아니라 부품들을 의지로 묶어 내는 방식에 있을 수 있다. 네트워크 모델(7장)이 바로 이 지점을 설명하려 한다.

감정: 무서운 이야기를 읽어도 땀이 나지 않는다

2021년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대학교의 위컨, 키오, 피어슨은 참가자들에게 무서운 이야기를 읽게 하며 피부 전도(긴장하면 손에 땀이 나며 전기가 잘 통하는 현상)를 쟀다. 보통 사람은 "당신은 어두운 비행기 안에 있고, 난기류가 심해지며…" 같은 글을 읽을 때 피부 전도가 올라갔다. 아판타시아인은 거의 평평했다. 그런데 무서운 사진을 직접 보여 주면 똑같이 반응했다.

해석은 이렇다. 우리는 글을 읽을 때 머릿속에 장면을 그리고, 그 그림이 몸의 공포 반응으로 가는 다리 역할을 한다. 아판타시아인은 그 다리가 약하다. 이것은 트라우마, 불안, 공포증을 이해하는 데 직접적인 의미가 있다(11장).

증언: 덜 기억하지만 덜 틀린다

2023년 영국의 단도 연구팀은 아판타시아인을 모의 목격자로 세웠다. 이들은 사건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30% 적게 떠올렸지만 오류는 더 많지 않았고 정확도는 같았다. 더 흥미로운 것은, 경찰이 쓰는 표준 인터뷰 기법인 "그때 장면을 머릿속에 다시 떠올려 보세요(맥락 복원)"가 이들에게는 오히려 방해가 됐다는 점이다.

2021년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의 윌마 베인브리지 연구팀은 아판타시아인 61명에게 방 사진을 보여 주고 나중에 기억으로 그리게 했다. 온라인 평가자 2,795명이 그림을 채점했다. 아판타시아인은 물건을 덜 그렸고, 색을 덜 썼고, 대신 글자로 이름표를 붙였다. 그런데 물건의 위치는 대조군만큼 정확했고, 없던 물건을 그려 넣는 기억 오류는 오히려 적었다. 보면서 따라 그릴 때는 차이가 없었다.

베인브리지 외(2021)의 기억 그림 예시크게 보기

▲ Bainbridge et al. (2021), Cortex, Figure 3 (bioRxiv 판, CC0). 왼쪽부터 원본 사진 | 아판타시아인의 기억 그림, 보면서 따라 그린 그림 | 대조군의 기억 그림, 따라 그린 그림. 위 세 줄은 기억 점수가 낮은 예, 아래 세 줄은 높은 예다. 아판타시아인의 기억 그림은 휑하고 색이 없으며 "FIRE PLACE" 같은 글자 이름표가 붙기도 한다. 그런데 오른쪽 '따라 그리기' 칸에서는 두 집단의 그림이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그리는 손이 아니라 떠올리는 과정이 다르다는 증거다.

숫자로 보면 차이가 더 분명하다.

항목아판타시아 (61명)대조군 (52명)
기억으로 그린 물건 수 (사진당)4.98개6.32개
보면서 따라 그린 물건 수20.07개18.00개 (차이 없음)
기억 그림에 색을 쓴 비율21.6%38.2%
기억 그림에 글자 이름표를 쓴 비율29.6%16.0%
물건 위치의 정확도차이 없음차이 없음
없던 물건을 그려 넣은 그림176장 중 3장152장 중 14장

두 연구가 같은 이야기를 한다. 그림이 없는 기억은 덜 풍부하지만, 그림이 만들어 내는 그럴듯한 가짜 세부도 덜 섞인다.

네 사람, 같은 바닷가

같은 바닷가를 떠올린 네 사람크게 보기

이 사례들이 모여 보여 주는 것은 결국 하나다. "지난 여름 바닷가를 떠올려 보세요"라는 같은 말에 누군가는 그림을, 누군가는 파도 소리와 속말을, 누군가는 헤엄치던 몸의 움직임을, 누군가는 사실의 목록을 떠올린다. 2026년 슈바르츠코프 연구팀은 사과가 '어디에' 떠오르는지만 물어도 사람들이 네 유형으로 갈린다는 것을 보였다(위의 사과 테스트 2단계). 1차 조사(95명)에서는 눈앞 공간에 투영하는 '프로젝터형'이 41.1%, 머릿속 어딘가의 '인사이더형'이 25.3%, 위치를 특정하기 어려운 '오프스크리너형'이 14.7%, 말로만 떠올리는 '버벌라이저형'이 18.9%였다. 더 넓게 모집한 2차 조사(230명)에서는 오프스크리너형이 42.6%로 가장 많았다.

슈바르츠코프 외(2026)의 네 가지 자기 분류와 VVIQ-2 점수크게 보기

▲ Schwarzkopf et al. (2026), Royal Society Open Science, Figure 3. (A) 네 유형: 버벌라이저("빨갛고 둥근 사과, 위에 초록 잎"이라는 말), 인사이더(머릿속의 사과), 오프스크리너(생각 구름 속 사과), 프로젝터(얼굴 앞 공간의 사과). (B) 유형별 VVIQ-2 선명도 점수(32~160점, 점 하나가 한 사람). 버벌라이저(회색)는 거의 바닥에 모였지만, 다른 세 유형 안에서도 점수가 낮은 사람이 섞여 있다. 유형과 선명도가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CC BY 4.0)

그렇다면 뇌는 이 다양한 경험을 어떻게 만들어 낼까. 여기서부터 논문의 본론, 아키텍처로 들어간다.

5. 아키텍처 ① 옛 모델 — "상상은 거꾸로 보는 것"

보는 과정부터

컵을 볼 때 뇌에서 일어나는 일을 아주 단순하게 그리면 이렇다.

눈 (망막)
시상 (중계소)
1차 시각피질 V1
선·방향·밝기
고차 시각 영역
모양·색·얼굴(방추상회)
전두·두정 영역
"컵이다", 주의·판단

신호는 뒤쪽의 단순한 특징 처리에서 앞쪽의 의미 처리로 흐른다. 이것을 '상향(bottom-up)' 처리라 부른다.

거꾸로 돌리면 상상이 된다?

상상은 거꾸로 돌린 영사기일까크게 보기

2019년 조엘 피어슨은 『네이처 리뷰 신경과학』에 「인간 심상의 인지신경과학」이라는 영향력 큰 리뷰를 냈다. 여기서 정리된 모델을 흔히 '거꾸로 보기(reverse perception)' 모델이라 부른다. 상상할 때는 위 흐름이 반대 방향으로 돈다.

1
앞쪽이 요청한다. 전전두엽의 계획 영역이 "컵을 떠올리자"는 명령을 낸다.
2
기억이 세부를 공급한다. 해마와 측두엽의 기억 영역이 컵의 모양·색·질감 정보를 꺼낸다.
3
신호가 뒤로 흘러간다(하향 처리). 고차 시각 영역을 거쳐 뒤쪽으로 내려간다.
4
V1이라는 '화면'에 그림이 다시 그려진다. 실제로 볼 때 쓰는 바로 그 화면이다. 그리고 이 화면이 얼마나 강하게 켜지느냐가 심상의 선명도를 결정한다.

이 모델에는 강력한 증거가 있었다. fMRI 스캐너로 V1의 활동 패턴만 읽어도 사람이 무엇을 상상하는지 맞힐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볼 때의 패턴과 상상할 때의 패턴이 비슷하다는 연구도 쌓였다. 심상이 강한 사람일수록 V1이 더 작거나 흥분도가 낮다는 연구도 있었다. 영사기가 스크린을 비추듯, 상상은 시각피질에 되비친 그림이라는 설명은 직관적이고 우아했다.

아판타시아도 이 모델로 쉽게 설명됐다. 요청이든 공급이든 되비추기든, 파이프라인 어딘가가 막혔다.

무엇이 문제인가: 상관은 인과가 아니다

아널드 연구팀은 여기서 오래된 격언을 꺼낸다. 이런 해석들은 "상관이 인과를 입증하지 않는다는 격언을 무시한다."

스캐너가 V1에서 상상 내용을 읽어 낸다는 것은 V1에 그 정보가 있다는 뜻이지, V1이 그 경험을 만든다는 뜻이 아니다. 저자들의 지적은 구체적이다. 상상한 도형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뒤쪽 시각 영역이 스캐너가 읽을 만큼 살짝 흔들릴 수 있다. 그 흔들림이 '그림을 보는 느낌'에 아무 역할을 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온도계가 방의 온도를 정확히 읽는다고 온도계가 방을 데우는 것은 아니다. 인과를 보려면 V1을 직접 건드리거나, V1이 없는 사람을 봐야 한다. 그 증거들이 6장이다.

6. 아키텍처 ② 균열 — 시각피질이 없어도 상상하는 사람들

증거 1: V1을 조용하게 만들었더니 더 선명해졌다

조광기는 빛을 만들지 않는다크게 보기

2020년 레베카 키오, 요한나 베르크만, 조엘 피어슨은 『이라이프』에 흥미로운 실험을 발표했다. 두피에 약한 직류 전기를 흘리는 경두개 직류 자극(tDCS) 으로 V1의 흥분도를 낮췄다. 옛 모델대로라면 '화면'의 밝기를 낮춘 셈이니 심상이 흐려져야 한다.

결과는 반대였다. V1을 조용하게 만들자 심상이 더 강해졌다.

실험의 논리를 차근차근 보자. 먼저 '심상의 세기'를 설문이 아니라 행동으로 쟀다. 참가자는 빨간 가로줄무늬나 초록 세로줄무늬 중 하나를 6초 동안 상상한 뒤, 한쪽 눈에는 빨간 줄무늬를, 다른 쪽 눈에는 초록 줄무늬를 동시에 보는 화면(양안 경쟁)을 0.75초 본다. 두 눈에 다른 그림이 들어가면 뇌는 둘 중 하나만 의식에 올리는데, 방금 상상한 쪽이 이길 확률이 높을수록 심상이 강하다고 본다. 이를 양안 경쟁 프라이밍이라 한다.

그다음 세 가지 증거를 쌓았다.

  1. 휴지기 fMRI(31명)와 TMS(32명). 경두개 자기 자극(TMS)으로 뒤통수를 자극하면 빛이 번쩍이는 착시(섬광)가 보이는데, 이게 보이기 시작하는 문턱이 낮을수록 시각피질이 흥분하기 쉽다. 시각피질이 흥분하기 쉬운 사람일수록 심상은 약했다(r = −0.43).
  2. tDCS로 직접 조작(1.5 mA). 흥분도를 낮추는 음극 자극을 시각피질에 주자 프라이밍이 늘었고, 흥분도를 높이는 양극 자극이나 가짜 자극(sham)은 그렇지 않았다.
  3. 앞쪽은 반대. 전전두엽에 양극 자극을 주자 심상이 강해졌다. 시각피질과 상전두 영역의 활동 비율이 심상 세기를 예측했다(rs = −0.53).

키오 외(2020)의 tDCS 실험 결과크게 보기

▲ Keogh, Bergmann & Pearson (2020), eLife, Figure 4. 위의 머리 그림은 전극 위치(파랑 = 뒤통수, 분홍 = 이마 또는 뺨), 아래 점 그래프는 자극 뒤 프라이밍(심상 세기)의 상대 변화다. 0보다 위면 심상이 강해졌다는 뜻이다. (A) 1 mA에서는 차이가 없다. (B) 1.5 mA에서 음극(파랑, 시각피질 흥분도 낮춤)이 양극(분홍)보다 유의하게 높다(). (C) 가짜 자극(회색)을 추가해도 음극만 올라간다. (CC BY 4.0)*

피어슨 연구팀은 이것을 V1의 '잡음'이 적을수록 하향 신호가 더 또렷해진다는 식으로 해석한다. 아널드 연구팀도 V1이 심상을 키우거나 줄일 수 있다는 점은 받아들인다. 다만 V1은 다른 영역의 활동을 조절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본다. 조광기(디머)가 방을 밝게도 어둡게도 하지만 스스로 빛을 내지는 않는 것처럼.

증거 2: 양쪽 V1이 파괴된 환자가 상상한다

가장 강력한 증거는 병원에서 나온다. 2015년 네덜란드의 베아트리스 더 헬더(Beatrice de Gelder) 연구팀은 『코텍스』에 양쪽 1차 시각피질이 모두 파괴된 환자를 보고했다. 그는 시야 전체가 보이지 않는 '피질맹' 상태였다. 옛 모델대로라면 그림을 그릴 화면 자체가 없으니 상상도 불가능해야 한다.

환자 TN은 59세의 의사였다. 52세에 연달아 두 번 뇌졸중을 겪어 양쪽 V1이 파괴됐고, 물체와 얼굴을 알아보는 고차 시각 영역 일부도 거의 손상됐다. 연구진은 fMRI 안에서 그에게 "화난 사람"이나 "나무"를 떠올리게 했다.

TN은 상상이 어렵지 않다고 했다. 자기 삶의 기억을 떠올려 사람을 상상했다. 그리고 사람을 상상할 때 그의 뇌 앞쪽·옆쪽 영역이 눈이 보이는 대조군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반응했다. 옛 모델이 '필수'라고 본 화면이 없는데도 심상은 남아 있었다. 리뷰는 이런 환자가 여럿 보고됐다고 정리한다.

증거 3: 수십 편을 합쳐 보면 V1은 자주 조용하다

개별 연구는 우연일 수 있다. 그래서 여러 연구를 합쳐 보는 메타분석이 중요하다. 2021년 프랑스 파리 뇌연구소의 알프레도 스파냐, 파올로 바르톨로메오 연구팀은 41편 연구에 실린 46개 fMRI 실험(참가자 671명, 활성 좌표 787개)을 합쳤다. 상상할 때 일관되게 켜진 곳은 양쪽 전두–두정 네트워크, 왼쪽 섬엽, 그리고 왼쪽 측두엽 아래쪽의 방추상회였다. 초기 시각피질(V1)에 대해서는 베이즈 분석이 오히려 '활동하지 않는다'는 쪽의 증거를 냈다(베이즈 인자 0.33 미만).

이 연구팀은 방추상회 안에서 상상할 때 꾸준히 켜지는 지점에 '방추상회 심상 노드(FIN, Fusiform Imagery Node)' 라는 이름을 붙였다. 얼굴과 글자를 알아보는 데 쓰이는 영역 바로 근처다.

스파냐 외(2021)가 제안한 심상 네트워크 모델크게 보기

▲ Spagna, Hajhajate, Liu & Bartolomeo (2021), Neuroscience & Biobehavioral Reviews, Figure 12 (bioRxiv 판, CC BY-ND 4.0). 왼쪽: 뇌 옆면의 빨간 점들이 주의·작업기억을 담당하는 전두–두정(FP) 네트워크. 오른쪽: 측두엽 아래쪽을 확대한 '핵심 심상 네트워크'. 빨강이 FIN, 노랑이 측두엽 앞쪽(ATL, 의미 지식), 청록이 내측두엽(MTL, 기억)이다. V1은 이 그림 어디에도 없다.

그림을 말로 풀면 이렇다. 무엇을 떠올릴지 붙잡는 일은 전두–두정 네트워크가 하고, 사과가 무엇인지(의미)는 측두엽 앞쪽이, 언제 어디서 본 사과인지(기억)는 내측두엽이 공급하며, 이것들이 FIN에서 시각적 형태로 모인다. 2025년 같은 연구팀의 7테슬라 fMRI 연구(아판타시아 10명 대 보통 10명)에서 아판타시아인도 상상할 때 FIN이 켜졌지만, FIN이 전두–두정 영역과 함께 움직이는 연결은 보통 사람 10명 중 9명에게서, 아판타시아인은 10명 중 5명에게서만 보였다. 아판타시아인 10명 중 8명은 "나눠서 이름 붙이기" 전략으로 과제를 풀었다고 답했다.

증거 4: 방추상회를 다친 건축가

2020년 산드라 소루도티르 연구팀은 『브레인 사이언스』에 한 건축가(PL518)의 사례를 보고했다. 제목은 「상상하는 능력을 잃은 건축가」. 평생 머릿속으로 건물을 그려 온 그는 양쪽 뒤쪽 뇌혈관(후대뇌동맥)에 뇌졸중을 겪은 뒤 마음의 그림을 잃었다(VVIQ 18점). 그의 말은 이렇다. "예전에는 탁, 하고 답이 그냥 보였어요. 이제는 훨씬 의식적인 과정이에요. 거의 목록처럼 떠올리고 있어요."

연구진은 영리한 비교를 했다. 비슷하게 양쪽 뒤쪽에 뇌졸중을 겪었지만 심상은 멀쩡한 환자 3명(VVIQ 49·53·72점), 그리고 오른쪽 뇌를 다쳤지만 심상이 멀쩡한 다른 건축가 한 명(76점)과 손상 위치를 겹쳐 봤다. 그러자 PL518에게 있는 손상은 왼쪽 방추상회의 작은 부분(그리고 오른쪽 설회 일부)으로 좁혀졌다.

소루도티르 외(2020)의 병변 비교크게 보기

▲ Thorudottir et al. (2020), Brain Sciences, Figure 3. 뇌를 아래에서 위로 자른 MRI 단면들. (A) 빨강 = 건축가 PL518의 손상, 초록 = 심상이 멀쩡한 다른 환자 3명의 손상, 노랑 = 겹치는 부분. (B) 빨강 = PL518, 파랑 = 심상이 멀쩡한 다른 건축가, 자홍 = 겹치는 부분. 겹치지 않고 빨강으로만 남은 작은 영역이 '상상을 잃게 만든 차이'의 후보다. (CC BY 4.0)

증거 5 (2026): 아판타시아를 일으킨 병변은 모두 FIN과 연결되어 있다

2026년 『코텍스』에 실린 커치 외(Kutsche, Fox, Kletenik 등) 연구는 '병변 네트워크 매핑'이라는 방법을 썼다. 뇌 손상 뒤 아판타시아가 생긴 환자 12명의 손상 위치를, 건강한 사람 1,000명의 뇌 연결 지도(커넥톰) 위에 올려 "이 손상 부위가 어디와 연결되어 있나"를 계산했다. 비교를 위해 다른 증상을 일으킨 887개의 손상도 함께 분석했다.

결과는 놀랍다. 12개 손상 중 FIN 위에 직접 있는 것은 5개뿐이었다. 그런데 12개 모두 왼쪽 FIN과 연결되어 있었다. 베이즈 분석은 전두엽이나 V1을 '중심'으로 보는 설명을 지지하지 않았다. 부품을 직접 부수지 않아도, 부품으로 가는 배선을 끊으면 상상이 사라진다.

두 모델의 예측을 직접 비교해 보자

아래 위젯에서 모델을 바꿔 가며 증거 카드를 넘겨 보자. 손상된 영역이 꺼질 때 각 모델이 무엇을 예측하는지, 실제로 무엇이 관찰됐는지 나란히 볼 수 있다.

이 증거들을 종합해 아널드 연구팀은 거꾸로 보기 모델이 "적어도 원래 형태로는 대체로 신뢰를 잃었다"고 결론짓는다. 다만 문을 완전히 닫지는 않는다. 2026년 쾨니히로베르트·페이스·피어슨이 『사이콜로지컬 리뷰』에서 제기한 온건한 버전, 즉 뒤쪽으로 되돌아가는 신호가 V1의 잡음을 눌러서 다른 곳에서 조립된 그림을 더 또렷하게 만든다는 가능성은 열어 둔다. 그 경우에도 V1은 원천이 아니라 조력자다.

7. 아키텍처 ③ 논문 그림 해부 — 온 뇌가 만드는 그림

논문의 그림 1

리뷰에는 그림이 딱 하나 있다. 저자들이 생각하는 심상 네트워크를 뇌 옆면 위에 색으로 칠한 것이다.

아널드 외(2026) 리뷰의 그림 1 — 심상에 관여하는 뇌 영역크게 보기

▲ Arnold, Bouyer, Saurels & Schwarzkopf (2026), Consciousness and Cognition, Figure 1. 왼쪽이 이마, 오른쪽이 뒤통수 방향이다. 물음표가 붙은 영역은 역할이 아직 논쟁 중이라는 뜻이다. (CC BY 4.0)

그림을 영역별로 읽어 보자. 왼쪽이 얼굴 쪽이다.

색 · 영역위치심상에서 맡는 역할(리뷰와 관련 연구)물음표?
파랑 · 전전두엽이마 바로 뒤, 뇌의 앞부분 전체무엇을 떠올릴지 정하고, 떠올리는 과정을 시작·유지한다. 2025년 7테슬라 연구에서 아판타시아인은 특히 왼쪽 앞쪽 전전두엽과 FIN 사이의 연결이 약했다.확정
주황 · 섬엽측두엽과 전두엽 사이 깊숙한 곳심장 박동·호흡 같은 몸 안쪽 신호(내수용 감각)를 처리한다. 실바토(2025)는 상상에 '안쪽으로 향한 주의'와 '내가 떠올리고 있다는 주체감'이 필요하고 그게 섬엽에서 온다고 본다.? 논쟁 중
초록 · 하두정엽정수리 뒤쪽 아래주의를 붙잡고, 공간 관계를 다루고, 움직임을 계획한다. 전두–두정 주의 네트워크의 한 축.확정
보라 · 방추상회측두엽 아래쪽 면을 따라 긴 띠(점선 테두리)모양·색·얼굴 같은 시각 내용을 불러온다. 특히 왼쪽의 FIN이 핵심. 이 영역을 다친 건축가는 상상을 잃었다.확정
빨강 · 1차 시각피질뒤통수 맨 끝옛 모델의 '화면'. 새 모델에서는 필수 원천이 아니라 조절자일 가능성. 양쪽이 파괴된 환자도 상상했다.? 필수인지 논쟁 중

이 그림에서 눈여겨볼 것은 화살표가 없다는 점이다. 옛 모델의 그림은 앞에서 뒤로 가는 화살표의 파이프라인이었다. 이 그림은 영역들의 목록이다. 어느 영역이 먼저이고 어디가 마지막인지 말하지 않는다. 그게 창발 틀의 핵심이다.

경쟁하는 이론들 — 무엇이 고장 났나

네트워크 안에서 정확히 무엇이 고장 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이론이 경쟁한다. 리뷰는 이들을 경쟁자가 아니라 퍼즐 조각으로 본다.

이론핵심 주장잘 설명하는 것
기능적 단절
리우·바르톨로메오 (2025)
아판타시아인도 상상할 때 FIN을 포함한 시각 영역이 켜진다. 문제는 FIN과 전두–두정 네트워크 사이의 연결이 약하다는 것.뇌 활동은 있는데 경험이 없는 현상. 후천성 병변이 모두 FIN과 '연결'된다는 결과.
3단계 주의 모델
리우 (2026)
심상은 생성 → 통합 → 증폭 세 단계를 거쳐 의식에 닿는다. 선천성 아판타시아는 생성이 아니라 통합이나 증폭에서 실패한다. 후천성은 시각 지식 자체를 잃은 경우가 많다.과제는 잘 푸는데 그림은 안 보이는 현상(생성은 되고 있으니까).
내수용 감각·섬엽 모델
실바토 (2025)
예측 부호화 관점. 섬엽 기능이 약하면 몸 신호의 정밀도가 낮아져, 하향 예측이 의식에 닿을 만큼의 '증폭'을 못 받는다. 주체감도 약해진다.꿈에서는 보이는 현상. 잠자는 동안에는 몸 신호 입력이 억제되니 다른 경로로 심상이 살아난다는 설명.
통합 모델
숄츠·몬첼·크밤메·리우·실바토 (2026)
아판타시아인 뇌에서 읽히는 신호는 심상이 아니라 '감각 전구체'다. 국소 통합이 이를 지각 표상으로 만들고, 몸 신호와의 추가 통합이 의식적 심상으로 만든다.위의 주의 모델과 섬엽 모델을 한 틀에 합친다.
기억 모델
블롬크비스트 (2023, 철학)
아판타시아는 일화 기억 인출 과정의 이상이다. 기억과 상상은 같은 '구성' 과정을 쓴다.자전적 기억 결손, 미래 상상의 빈약함이 함께 나타나는 현상.

이 중 리우의 3단계 모델은 그림으로 보면 훨씬 쉽다.

리우(2026)의 의식적 심상 3단계 모델크게 보기

▲ Liu (2026), Neuropsychologia, Figure 1. 뇌 옆모습 그림에서 주황 타원은 전두·두정 영역, 이어진 원들은 시각 영역이다. (A) 지각: 역치 하 → 전의식 → 의식. (B) 의지적 심상: 생성 → 통합 → 증폭. 빨간 점선은 '전의식의 경계'다. (C) 사과 예시: 파란 원(개념 내용, "사과는 둥글고 먹는 과일")이 주황 원(시각 내용, "빨갛고 노란 줄무늬의 갈라 사과")으로 채워지다 마지막에 생각 구름 속 사과가 된다. (D) 저절로 떠오르는 심상은 아래(시각 영역)에서 위로 간다. (CC BY 4.0)

리우(2026)의 아판타시아 버전크게 보기

▲ 같은 논문 Figure 3. (A) 아판타시아에서 생성 단계는 대체로 작동하지만(개념 지식은 보고 가능), 통합과 증폭 화살표에 빨간 ✗가 있다. (B) 네트워크 수준에서는 전두안구영역(FEF)과 FIN을 잇는 선, 그리고 시각피질 상자가 빨간 점선이다. 부품이 아니라 연결과 증폭이 약하다는 가설을 그린 것이다. (CC BY 4.0)

창발 틀: 화음은 줄 하나에 있지 않다

줄 하나로는 화음이 되지 않는다크게 보기

아널드 연구팀이 내놓은 창발 속성 틀(emergent property framework) 은 이 이론들 위에 한 층 더 올라간다. 마음의 그림은 전전두엽, 방추상회 띠, 그리고 움직임 계획에 관여하는 두정 영역이 협응할 때 생기는 성질이다.

보도 기사가 쓴 비유가 가장 쉽다. 화음은 여러 줄이 동시에 울려야 생긴다. 줄 하나를 튕기면 음 하나가 날 뿐 화음은 절대 나지 않는다. 화음은 어느 줄에도 '들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화음을 담당하는 줄이 어디냐"는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다. "V1이 심상을 만드냐"는 질문도 같다.

이 틀이 설명하는 것들을 정리하면 이렇다.

  • 아판타시아가 여러 모습인 이유. 네트워크는 여러 곳에서 망가질 수 있다. 시각 내용을 불러오는 줄만 약하면 그림만 없고 속말은 있다(시각 아판타시아). 줄들을 묶는 공통 줄이나 증폭이 약하면 여러 감각이 함께 사라진다(전감각 아판타시아, 아판타시아인의 약 4분의 1). 리뷰의 공동 저자 부이어는 그림뿐 아니라 소리 심상까지 없어 머릿속 혼잣말이 없다.
  • 꿈은 꾸는데 깨어서는 못 보는 이유. 꿈과 의지적 상상은 네트워크를 다르게 묶는다. 같은 줄을 다른 방식으로 튕길 수 있다.
  • 모든 사람이 다른 이유. 네트워크 연결 세기는 사람마다 연속적으로 다르다. 그러니 심상의 선명도도, 어떤 감각이 강한지도 자연스럽게 스펙트럼을 이룬다. 누군가는 주로 그림으로, 누군가는 속말로, 누군가는 움직임이나 냄새로 생각한다. 저자들은 이 차이가 사람들이 일상에서 각 감각의 상상을 얼마나 자주 쓰는지로 드러날 것이라고 예측한다.

직접 줄을 튕겨 보자. 줄 하나만 내릴 때와 공통 줄을 내릴 때 결과가 어떻게 다른지 보라.

'무의식적 심상'이라는 말은 왜 동어반복인가

이 틀에서 가장 날카로운 주장이 여기서 나온다.

철학자 벤스 나나이(2020)는 아판타시아인이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심상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고 제안했다. 근거 중 하나는 아판타시아인이 회전된 두 도형이 같은지 판단하는 심적 회전 과제를 잘 푼다는 것이었다. 그림 없이 어떻게 돌리나. 의식 아래에서 돌리고 있는 것 아닌가.

2024년 호주의 래클런 케이, 키오, 피어슨은 이를 직접 확인했다. 셰퍼드–메츨러 블록 과제와 사람 모형(마네킹) 회전 과제를 아판타시아인과 대조군 수백 명에게 풀게 했다. 논문 제목이 결과를 요약한다. 「아판타시아에서의 더 느리지만 더 정확한 심적 회전 수행은 인지 전략의 차이와 연결된다」.

케이 외(2024)의 심적 회전 결과크게 보기

*▲ Kay, Keogh & Pearson (2024), Consciousness and Cognition, Figure 2. 청록 = 아판타시아, 연어색 = 대조군, 가로축 = 회전 각도(0~150°). (A) 반응 시간: 두 집단 모두 각도가 클수록 느려지지만(셰퍼드–메츨러의 고전적 결과) 아판타시아가 더 느리다. (B) 정확도: 각도가 커질수록 청록이 연어색보다 위에 있다(150°에서 약 80% 대 69%, 는 유의한 차이). (CC BY 4.0)

전략 설문에서 대조군은 "머릿속에서 물체를 돌렸다"에 동의했고, 아판타시아인은 반대로 "논리적 기준을 썼다"에 동의했다. 예컨대 "이 팔이 저쪽을 향하면 저 블록은 반드시 이쪽에 있어야 한다" 같은 규칙으로 특징을 하나씩 대조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대조군은 빠를수록 덜 정확했지만(속도–정확도 교환), 아판타시아인은 빠른 사람이 오히려 더 정확했다. 그림을 돌리는 방법과 규칙을 대조하는 방법은 서로 다른 계산이다.

그런데 2024년 12월 더 강한 도전이 나왔다. 『커런트 바이올로지』(2025년 2월호)에 실린 창·피어슨 연구팀의 연구는 아판타시아인 14명과 대조군 18명이 줄무늬를 상상하는 동안 V1 활동을 분석했다. 두 집단 모두에서 상상한 내용이 똑같이 잘 읽혔다. 제목이 「아판타시아의 이미지 없는 심상」이었다. 다만 아판타시아인의 신호는 반대쪽이 아니라 같은 쪽 뇌에서 나왔고, 실제로 볼 때의 패턴으로 학습한 해독기로는 읽히지 않았다. 2025년 숄츠·몬첼·리우는 반박문에서, 지각과 공유되지 않는 신호라면 '무의식적 심상'이 아니라 비지각적 전략의 흔적일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아널드 연구팀의 입장은 분명하다. 심상이란 느껴지는 경험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니 "느껴지지 않는 느낌"이라는 뜻의 '역치 하 심상'은 리뷰의 표현으로 "동어반복" 이다. 뇌 어딘가에서 정보 조각을 읽어 낼 수는 있다. 그걸 뭐라 부르든 "어떤 신경학적 차이가 아판타시아인이 무언가를 회상할 때 의식적인 그림 감각을 갖지 못하게 막는 것으로 보인다." 정보가 있다는 것과 경험이 있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 구분은 뒤에서 뇌 디코딩과 AI를 이야기할 때(10장) 다시 결정적으로 쓰인다.

8. 측정의 문제 — 왜 아직 객관적 검사가 없나

리뷰의 가장 실용적인 결론은 이것이다. 아판타시아를 가려내는 객관적 검사는 아직 없고, 있는 척하지 말아야 한다. 프라이밍 기법, 동공 측정, 자기 평가 설문 모두 부족했다. 따라서 자폐나 불안처럼, 앞으로도 한동안은 자기 보고·행동·뇌영상이 함께 수렴하는지로 판단해야 한다.

지금까지 나온 측정법들을 하나씩 실험해 보자.

위젯에서 가장 인상적인 측정법 하나는 원본 그래프로 직접 보자. 2022년 케이 연구팀의 동공 반응 실험이다. 밝은 것을 보면 동공이 작아지는 건 누구나 안다. 놀랍게도 밝은 것을 상상만 해도 동공이 조금 작아진다.

케이 외(2022)의 아판타시아인 동공 반응크게 보기

▲ Kay, Keogh, Andrillon & Pearson (2022), eLife, Figure 3 (아판타시아인 18명만). (A) 시간에 따른 동공 크기 변화. 빨강 = 밝은 삼각형, 파랑 = 어두운 삼각형. 실제로 볼 때(앞부분)는 두 선이 뚜렷이 벌어지지만, 상상하는 구간(확대한 작은 그림)에서는 두 띠가 완전히 겹친다. (B) 상상 구간의 막대도 빨강과 파랑의 높이가 같다. 일반 참가자 42명에게서는 상상 구간에서도 파랑이 빨강보다 위에 있었다(동공이 밝은 상상에 반응). (CC BY 4.0)

일반 참가자는 상상한 밝기에 따라 동공이 달라졌고, 그 차이는 매 시행의 선명도 평가와 함께 움직였다. 아판타시아인은 실제 빛에는 정상적으로 반응했고, 삼각형 네 개를 상상할 때 하나일 때보다 동공이 커졌다(정신적 노력의 신호). 즉 열심히 하고 있는데, 상상한 밝기만 몸에 닿지 않았다. 연구진은 이를 "아판타시아의 첫 생리학적 검증"이라 불렀다.

그런데도 리뷰는 이것을 진단 도구로 보지 않는다. 아판타시아인 18명 중 차이 점수가 0 이하였던 사람은 61%(11명)였고, 일반 참가자 중에도 9.5%(4명)가 그랬다. 집단 평균은 확실히 다르지만 개인을 가르기에는 겹치는 부분이 크다.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 이 측정은 심상이 몸에 남긴 결과를 재는 것이지 경험 자체를 재는 것이 아니다.

설문을 둘러싼 2026년의 논쟁

자기 보고 설문의 문제는 2026년 들어 두 방향으로 갈라졌다.

비판 쪽. 호주 매쿼리 대학교의 술파로(2026, 『사이코노믹 불리틴 앤 리뷰』)는 '선명도'라는 말에 정해진 축이 없어서 사람마다 다른 기준으로 답한다고 지적했다. 자기가 보는 것이 '실제처럼 선명한' 것인지 알려면 남의 머릿속과 비교해야 하는데 그게 불가능하다. 그의 조사에서 41%가 자기 심상이 남과 다르다고 믿었다. 또 '객관적 지표'들은 애초에 자기 보고로 집단을 나눈 뒤 찾아낸 것이라 순환 논리라고 비판했다. 그의 결론은 VVIQ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방어 쪽. 이번 리뷰의 저자들이 참여한 슈바르츠코프 연구팀(2026, 『왕립학회 오픈 사이언스』)은 반대로, 선명도 평가가 심상의 세부 정도, 눈 감고 보이는 다른 시각 경험, 꿈의 선명도와 일관되게 연결된다며 탄탄한 척도라고 봤다. 오히려 긴 설문 대신 선명도 한 문항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2026년 몬첼 연구팀도 159개국 35,467명의 자료로 "잘 아는 장소를 떠올려 보라"는 한 문항 선별 검사를 검증했다.

두 입장이 동의하는 지점도 있다. 하나의 숫자로 사람을 '아판타시아'와 '아니다'로 가르는 건 위험하다. 그리고 경험 그 자체는 결국 본인만 접근할 수 있다.

9. 리뷰의 세 칸 — 안다 · 틀렸다 · 모른다

논문 제목의 세 칸으로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해 보자. 아래는 초록과 보도, 그리고 이 특집이 확인한 관련 연구를 바탕으로 한 정리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안다고 생각했지만 틀렸던 것아직 모르는 것
아판타시아는 시각만이 아니라 여러 감각에 걸칠 수 있다상상은 V1이라는 화면에 그림을 되그리는 '거꾸로 보기'다V1이 심상에 필수적인 인과적 기여를 하는가
분산된 뇌 영역들이 협응하지 못할 때 생긴다스캐너가 V1에서 상상 내용을 읽으면 V1이 심상을 만든다아판타시아가 사물 심상에만 해당하고 공간 심상은 멀쩡한가
좌측 방추상회(FIN)와 전두–두정 네트워크의 연결이 핵심이다설문, 프라이밍, 동공 반응 같은 검사로 객관적 판정이 가능하다유전되는가(가족 내 집중은 보고됐지만 쌍둥이·유전체 연구는 아직 없다)
많은 아판타시아인이 꿈에서는 그림을 본다과제를 잘 풀면 심상이 있다(예: 테트리스, 심적 회전)아이들은 자라면서 심상을 얻거나 잃는가
아판타시아는 장애라기보다 내면 경험의 한 끝이다아판타시아인은 '무의식적 심상'을 갖고 있다훈련으로 눈 감고 '보는' 법을 배울 수 있는가

오른쪽 칸의 마지막 질문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훈련하면 볼 수 있게 되나요?" 정직한 답은 모른다다. 심상 훈련 앱과 프로그램은 많지만 선천성 아판타시아를 바꾼다는 신뢰할 만한 증거는 없다. 2025년 쾨니히로베르트·키오·피어슨은 환각제가 심상을 '켰다'는 일부 보고에 대해 정신건강 위험을 경고하기도 했다. 그리고 많은 아판타시아인은 바꾸고 싶어 하지 않는다. 소설가 마크 로렌스는 이렇게 썼다. "나는 삽을 시각화할 수 없지만 그게 뭔지 알고, 삽을 삽이라고 부른다."

10. 2026년, 기술의 역할 — 뇌 디코딩과 '인공 판타시아'

아판타시아 연구가 2026년에 특히 의미 있는 이유는 기술이 바로 이 질문, 정보와 경험은 같은가를 정면으로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뇌에서 그림을 읽어 내는 AI

뇌 활동에서 상상을 복원하는 2026년의 실험실크게 보기

2023년 오사카 대학교의 다카기 유와 니시모토 신지는 fMRI 뇌 활동을 이미지 생성 모델 스테이블 디퓨전에 연결해, 사람이 보고 있는 사진을 상당히 비슷하게 복원했다(CVPR 2023). 복잡한 생성 모델을 새로 학습시키지 않고도 가능했다는 점이 충격이었다. 2024년 마인드아이2(MindEye2)는 여러 사람의 데이터로 미리 학습한 뒤 새로운 사람의 fMRI 1시간 분량만으로 복원을 해냈고, 사람 평가자들은 97.82%의 비교에서 이 모델의 복원이 원본에 더 가깝다고 판단했다. 2023년 메타는 뇌자도(MEG)로 거의 실시간에 가까운 시각 인식 디코딩을 시연했다.

그런데 이것들은 모두 보는 것의 복원이다. 상상한 것은 훨씬 어렵다.

연구무엇을 했나한계 또는 논쟁
셴·호리카와·마지마·가미타니 (2019)심층 신경망 특징으로 본 이미지 복원, 상상 이미지에도 시도상상 이미지는 "초보적인" 복원에 그쳤다
고이데마지마·니시모토·마지마 (2024)베이즈 샘플링과 CLIP 의미 특징으로 상상한 자연 이미지 복원을 주장2025년 가미타니 연구실이 반박: 좋은 예만 골라 보여 줬고, 평가 지표가 순환적이고, 비교 기준이 불공정하다
MIRAGE (크닐랜드 외, 2026)상상 전용 fMRI 데이터(NSD-Imagery)로 상상 이미지 복원 평가. 사람 판별 정확도 78.30%본 이미지를 가장 잘 복원하는 모델이 상상 이미지도 가장 잘 복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단순한 선형 모델이 나았다
호리카와 '마인드 캡셔닝' (2025)뇌 활동을 언어 모델 공간에 대응시켜 문장으로 풀어냄. 참가자 6명, 1인당 약 17시간 촬영100개 후보 중 맞히기: 본 영상 약 50%, 회상한 영상 약 30%
창·피어슨 외 (2024)아판타시아인 14명의 V1에서도 상상한 줄무늬를 읽어 냄지각과 공유되지 않는 신호. 경험이 없는데 정보는 있다

MIRAGE의 결과는 이 특집의 논지와 정확히 맞물린다. 본 이미지를 잘 복원하는 모델이 상상을 잘 복원하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이 '약하게 본 것'이 아니라는 뜻일 수 있다. 거꾸로 보기 모델이 맞다면, 상상은 흐린 지각이니 같은 해독기가 통해야 한다.

그리고 창·피어슨의 결과는 가장 중요한 경고를 준다. 아판타시아인의 뇌에서도 상상한 내용이 읽혔다. 그런데 본인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뇌에서 정보를 읽어 낸 것을 "그 사람이 경험한 것을 읽었다"로 해석하면 안 된다. 뇌 디코딩이 마음 읽기로 과장될 때마다, 아판타시아는 가장 강력한 반례가 된다. 이것은 과학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뇌 데이터 프라이버시와 신경권(neurorights) 논의에서도 핵심이다. 무엇을 읽었는지 정확히 말하지 못하면, 읽은 결과로 사람을 판단하는 일도 위험해진다.

'인공 판타시아': 그림 없이 상상하는 LLM

두 번째 흐름은 대형 언어 모델(LLM)이다. 2025년 9월 미국 노스이스턴 대학교의 매카티와 모랄레스는 「인공 판타시아: 대형 언어 모델에서 창발하는 심상」을 arXiv에 올렸다. 1989년 핑크 연구팀의 고전 과제를 확장했다. 예컨대 "대문자 D를 떠올리고, 왼쪽으로 90° 돌리고, 그 아래에 대문자 J를 붙여라. 무엇이 보이나?"(답: 우산). 이런 2~4단계 변형 문제 60개를 사람 100명과 여러 AI 모델에게 풀게 했다(5점 만점).

Gemini 3 Pro
3.65
GPT-5 (높은 추론)
3.35
o3-Pro
3.31
사람 100명 평균
2.85
o4-mini
2.66
Claude Opus 4.1
2.65
GPT-5 (최소 추론)
2.04

▲ McCarty & Morales, arXiv:2509.23108 (최신 개정판 기준). 막대 너비 = 점수 / 5점 만점.

세 가지 결과가 아판타시아 연구와 겹친다.

  1. 그림을 한 장도 그리지 않은 모델이 사람보다 잘 풀었다. 텍스트로 추론하는 모델에게는 '마음의 눈'이 없다. 그런데도 머릿속 도형 조작 과제에서 사람 평균을 넘었다. 추론 토큰을 많이 쓸수록 점수가 올랐다(GPT-5 최소 추론 2.04 → 높은 추론 3.35).
  2. 이미지를 생성하게 해도 나아지지 않았다. 모델이 중간 단계를 그림으로 그리도록 하자 정확도가 "떨어지거나, 기껏해야 같았다."
  3. 사람의 심상 선명도는 점수를 예측하지 못했다. VVIQ 점수와 과제 점수의 상관은 r = −0.17로 유의하지 않았고, VVIQ 최저점(16점)인 참가자가 사람 중 5위였다.

저자들은 이 결과를 모델의 '심상'이 그림이 아니라 명제적(말 같은) 방식이라는 증거로 읽는다. 1970년대 피질로의 명제파가 AI에서 되살아난 셈이다. 그리고 VVIQ 16점 참가자의 5위는 아널드의 테트리스 일화와 정확히 같은 메시지다. 과제 수행은 심상 경험의 증거가 아니다.

이 연구를 "LLM은 아판타시아다"라는 식으로 읽고 싶어진다. 조심하자. 아판타시아는 인간의 경험이 없음을 말하는 개념이고, LLM에 경험이 있는지는 전혀 다른 질문이다. 다만 이 연구가 확실히 보여 주는 것은 있다. '상상력이 필요해 보이는 과제'를 푸는 길은 그림 하나가 아니다. 아판타시아인이 수십 년 전부터 조용히 증명해 온 사실을, 이제 기계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AI 연구는 반대 방향으로도 간다. 2024년 NeurIPS의 '비주얼 스케치패드'는 멀티모달 모델이 추론 중에 선과 상자를 그리게 해 수학 과제에서 평균 12.7%, 시각 과제에서 8.6% 성능을 올렸다. 딥마인드 계열의 DreamerV3(2025, 『네이처』)는 학습된 세계 모델 안에서 결과를 '상상'하며 배워 사람 데이터 없이 마인크래프트 다이아몬드를 캤다. 기계에게 그림을 그릴 도구를 쥐여 주면 도움이 되는 과제도 있고, 되지 않는 과제도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AI 이미지 생성은 아판타시아인의 '외부 마음의 눈'이 될까

2026년 아판타시아 커뮤니티에서 자주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이미지 생성 AI로 자기 기억이나 소설 속 장면을 그려 보면서 "처음으로 내가 무엇을 상상하고 있었는지 봤다"는 경험담이다. 떠나간 사람의 사진들로 기억 속 장면을 재구성해 본다는 사람도 있다.

흥미로운 가능성이지만 두 가지를 분명히 해 두자. 첫째, 현재 이것은 개인 경험담 수준이고 보조 기술로서의 효과를 검증한 동료 심사 연구는 찾기 어렵다. 둘째, 베인브리지의 그림 실험과 단도의 목격자 실험이 보여 줬듯, 그림은 그럴듯한 가짜 세부를 끌어들인다. 생성 AI가 채워 넣은 세부가 기억을 오염시킬 위험은 아판타시아인에게도, 보통 사람에게도 있다.

11. 이 연구가 우리 일상에 주는 것

마지막으로, 이 모든 이야기가 연구실 밖에서 무엇을 바꾸는지 보자.

교실에서. "눈을 감고 떠올려 보세요"로 시작하는 수업은 반에 한두 명에게는 공허한 지시다. 같은 내용을 그림·도식·말·손으로 만지는 모형 등 여러 경로로 제공하면 아무도 잃지 않는다. 기억술 역시 '장면 떠올리기'만이 아니라 관계와 규칙으로 외우는 방법을 함께 알려 주자.

명상과 상담에서. 캣멀도 로렌스도 안내 명상의 시각화 지시에서 자기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따뜻한 빛이 몸을 감싼다고 상상하세요"가 안 통하는 사람에게는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는 감각에 주의를 두세요"가 통할 수 있다. 심상에 크게 의존하는 치료(심상 재구성, 일부 노출 치료)는 아판타시아인에게 다르게 작동할 수 있다. 다만 2023~2025년 몬첼 연구팀의 실험에서 상상 노출을 통한 공포 소거는 아판타시아인에게도 효과가 있었다. 연구진은 "명제적 사고로도 상상 소거가 가능하다"고 결론 내렸다. 그림이 없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수사와 법정에서. "그때 장면을 떠올려 보세요"라는 맥락 복원 지시는 아판타시아 목격자에게 방해가 됐다. 그들은 덜 말하지만 덜 틀린다. 진술의 양이 적다고 신뢰도를 낮게 보면 안 된다.

제품과 UX에서. "상상해 보세요, 이 소파가 여러분의 거실에 놓인 모습을"이라는 광고 문구, 텍스트 설명만 있는 인테리어 앱, 음성 설명만 있는 길 안내. 사람의 내면 경험이 다양하다는 사실은 설계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 AR 미리보기나 도면 같은 외부 표상은 아판타시아인에게 특히 도움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위의 사과 테스트에서 몇 점이 나왔든, 이 연구가 주는 가장 큰 선물은 "남들도 다 나 같겠지"라는 가정을 의심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골턴의 과학자들은 심상을 공상이라 여겼고, 블레이크 로스는 양 세기를 비유라 여겼다. 반대로 선명한 심상을 가진 사람은 그것이 누구에게나 있다고 여긴다. 같은 단어가 다른 머릿속에서 전혀 다른 경험이 된다.

마치며 — 없는 것이 보여 주는 것

신경과학은 오래전부터 '없음'에서 배워 왔다. 말을 잃은 환자에게서 언어 영역을 찾았고, 기억을 잃은 환자 H.M.에게서 해마의 역할을 배웠다. 아판타시아는 조금 다르다. 잃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없는 경험, 그리고 무엇보다 삶을 잘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은 경험이다.

그래서 아널드 연구팀은 아판타시아를 "인간의 뇌가 어떻게 의식적 감각을 만들어 내는지에 대한 근본적 진실을 밝힐 유망한 경험적 통로"라고 부른다. 그림이 없는 사람들이 문제를 풀고, 소설을 쓰고,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게놈을 해독한다. 그렇다면 그림, 즉 '보는 듯한 느낌'은 뇌가 하는 일의 어떤 부분인가. 정보 처리와 경험은 어디서 갈라지는가.

2026년은 기계가 사람보다 도형 변형 문제를 잘 풀고, 스캐너가 본 적 없는 사람의 뇌에서 상상한 줄무늬를 읽어 내는 해다. 바로 이런 해에, 스스로 마음의 그림을 떠올리지 못하는 두 과학자가 말한다. 읽어 낸 정보가 곧 경험은 아니다. 그리고 마음의 그림은 어느 한 곳에 있지 않고, 온 뇌가 함께 만든다.

사과를 떠올리지 못해도 괜찮다. 사과가 빨갛고 둥글다는 것을 아는 방법은 하나가 아니다.


참고문헌

핵심 리뷰와 보도

역사와 명명

유병률과 사례

아키텍처와 측정

2026년의 기술

본문의 웹툰·삽화와 인터랙티브 위젯은 코어닷투데이가 제작했습니다. 리뷰의 그림 1과 인용한 논문 그림들은 설명 목적으로 원 출처를 밝혀 실었으며 저작권은 원저자와 출판사에 있습니다. 리뷰 본문 인용은 초록과 공개 보도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며, 정확한 표현이 중요한 대목은 원문을 함께 확인하시기를 권합니다. 이 글은 의학적 진단이나 조언을 대신하지 않습니다.